'당연하지'의 함정

by 어거스트

'당연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일의 앞뒤 사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그러하다' 라고 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일의 앞뒤 사정을 따져보기 전에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마땅한지'를 내 판단의 잣대로 삼게 될 때가 있다. 외국에서 유럽인들과 일을 하면서 나의 당연함이 그들의 당혹감이 되었던 경험들이 있다.


1. 9 to 6 vs. 9 to 5

나는 네덜란드에 온지 1년 8개월 만에 승진을 하는 행운을 누렸다. 거기에는 어제까지의 동료들이 하루 아침에 나의 팀원이 되는 어색한 부담도 따라왔다.

쿨한 팀장이 되고 싶었던 나는 근무 시간 외에는 회의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오전 9시 이전, 오후 6시 이후에 잡힌 회의들은 가능한 모두 9시와 6시 사이로 옮기도록 했다. 더불어 팀의 주간 회의도 나이스하게 오후 5시로 정했다. 모두가 좋아할 것이라 생각하니 내 기분도 꽤나 좋았다. 친한 동료였던 Dana의 이메일을 받기 전까지는.

"원숙, 이른 아침과 저녁 시간의 회의를 줄여준거 고마워. 그런데 난 5시의 팀 회의는 참석하지 못하겠어. 오후 5시 이후에는 개인 일정이 있거든".

오 마이 갓. 유럽애들은 정말 뻔뻔하기도 하지. 하지만 일단 잘 타일러 보자는 마음에 난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하필이면 모든 팀원들을 참조인으로 넣어서.

"다나, 그리고 팀 여러분, 9 to 6의 근무 시간 중에 불가피한 개인 일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해요. 나도 그럴 때가 있거든요. 하지만 그로 인해 팀 활동에 불참하게 될 때에는 사전에 저와 그 사유에 대해 논의해주고 함께 결정해주길 바래요."

나름 우아하고 어른스럽게 대응했다고 생각한 나의 이메일은 생각지도 못한 반향을 불러 있으켰다. 언제부터 회사의 근무 시간이 9 to 6 로 늘어났냐는 질문과 함께. 어떤 팀원은 인사부를 통해 회사의 취업규칙 비슷한 문서까지 찾아왔는데 거기엔 이렇게 써 있었다. The business hour is from 9 am to 5 pm, 8 hours per day. - 회사의 근무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하루 8시간입니다.

하루 8시간의 근무, 그리고 1시간의 점심시간. 나는 직장생활을 하는 20여년 동안 한번도 이 9 to 6의 공식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가끔은 아침 7시에도 (호주, 아시아) 밤 9시에도 (미국) 컨퍼런스 콜을 하니, 딱히 근무시간의 시작과 끝을 따져볼 기회가 없기도 했다.

결국 이 9 to 6 vs. 9 to 5 논란은 나의 착오를 인정하고 Dana에게 사과한 후 팀 회의 시간을 앞당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동시에 그 동안 나만의 9 to 6 의 프레임으로 유럽인들을 바라보면서 가졌던 탄복 (아니, 점심 시간도 쪼개가면서 샌드위치로 때우며 일을 하다니, 정말 생산성이 뛰어나군)이나 마땅치 않음 (아니, 이제 겨우 5시인데 다 어딜 도망가는거야)이 얼마나 쓸데 없었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그냥 그들의 일상을 살고 있을 뿐이었는데.

네덜란드 6년차인 지금은 나는 일정 관리 툴인 MS Outlook의 근무 시간을 9 to 5로 설정해 놓고, 가급적 모든 일정을 그 안에서 소화하면서 정해진 8시간 동안 치밀하고 촘촘하게 일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중이다. 이 또한 쉽지 않음을 깨달아가면서.


2. 한국에서의 회의가 월요일인데 그 전 주 목요일에 비행기를 탄다고?

코로나로 닫혔던 국경이 열리기 시작한 2022년 7월 경, 나는 우리 팀의 시니어 매니저 (한국의 차/부장급으로 볼 수 있지만 회사마다 매우 다르다)인 데니스와 다른 팀 직원과 같이 한국에 회의 차 방문을 하게 되었다. 일정이 월요일부터 시작하니, 나는 당연히 그 전 주 토요일에 출발해서 일요일 오후에 도착하는 KLM 항공권을 구매했다. 그리고 열심히 출장 준비 중인 데니스에게 지나가듯이 '토요일에 공항에서 보겠네' 했는데, 웬걸, 돌아온 대답이 놀라웠다. "아니, 원숙, 나는 목요일에 가". WHAT?!

내가 너무 놀라는게 티가 났는지 데니스가 말을 보탰다. "원숙, 나는 원래 금요일에 출발해서 토요일에 도착하려고 했어. 대륙간 여행이니 서울에 가서 하루 정도는 시차 적응을 해야 하고, 시장 조사도 해보려고. 그런데 금요일에는 항공편이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목요일에 가는거야."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출발 직전에 항공권을 변경해봤자 회사의 비용만 높아짐)이기에 튀어나오는 잔소리를 꾹 참으면서 겨우 한마디 했다. "오케이 알았어 데니스. 대신 한 가지 주의를 줄게. 지금 회사 전체가 비용을 줄이는 문제로 예민해. 지사들의 부담은 훨씬 더하지. 이럴 때 본사에서 double standard - 이중잣대를 가지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어. 주말에 서울에서 좋은 시간 보내고, Please keep it low key - 떠벌리고 다니지는 마."

일요일 오후 3시에 랜딩하고 나서 남산 힐튼호텔에 도착하니 오후 6시 경. 샤워하고 룸서비스로 저녁을 먹고 나니 피로가 몰려와서 까무룩. 그러곤 새벽 4시에 깨어나 도저히 다시 잠에 들 수 없었다. 시차 적응따윈 정신력으로 버티겠다며 월 화 수 (고객사 미팅), 그리고 목요일까지 마라톤 회의를 하고 나니 결국 목요일 오전 10시 경 컨디션에 제대로 적신호가 왔다. 메쓱거림과 구역질을 동반한 심한 편두통.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던 나는 4일간의 일정 종료를 단 2시간 남기고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회의실에서 버티고 있던 두 세시간 동안도 화장실과 직원 휴게실을 들락거리느라 직원들 정신만 어지럽게 했고.

약을 먹고 쉬면서 컨디션을 회복하는 동안 나는 "뭣이 중한디"를 생각해보게 됐다. 이틀을 먼저 와서 호텔 비용을 더 썼지만, 쌩쌩하고 힘차게 일정을 소화한 데니스와 내 기준에 맞춰 회사 비용은 아꼈지만 목요일에 좀비가 되어버린 나.

또 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나는 여전히 망설이겠지만 (목요일 비행기는 양심 상 죽어도 못탈 듯), 적어도 하루 정도 시차 적응의 여유는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젠 예전같은 20대 30대의 체력도 아니니 말이다.

당연함의 기준이 '내가 알던 방식, 내가 가진 경험' 일 때 자동 반사적으로 "뭣이 어째?"로 반응하게 되는 상황이 종종 있다. 그렇지만 사전이 알려주는 당연함의 기준은 "일의 앞뒤 사정을 놓고 볼 때 마땅하다". 생각의 중심에서 나를 조금 밀어내고, 일의 앞뒤 사정을 우선 살필 줄 아는 여유와 어른스러움을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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