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활짝 열린 기회: 해외 취업에 대한 현실 조언 A World of Opportunities: The Realities of an International Career."
강의는 50여 명의 경제학과 전공, 부전공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5명의 외국인 학생들도 있었다. 무척 즐거웠고, 담당 교수님과 학생들에게 고마웠다. 눈을 맞춰주고 잘 웃어주던 따뜻한 얼굴들. 특히 앞줄 중앙 커다란 눈의 여학생, 내 기준으로 좌측 앞줄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날리던 두 남학생들, 좌측 저 먼치 뒷줄의 복학생 같았던 훈남, 우측 뒷줄에 나란히 않은 외국인 여학생들이 기억에 남는다. (혹시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네, 본인들이세요. 많이 호응해 주어서 고마웠어요.)
강의가 끝나자 학생들이 연단 앞으로 줄을 섰다. 예상치 못했던 20여분의 질의응답 시간. 한 명 한 명의 개인적이고 진지한 질문들이 고맙고 반가웠다. 나의 응원하는 마음이 잘 전달되었기를.
강의 중에 알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수의 학생들이 해외 취업에 대해서 '나의 길이 아니라는'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유를 묻자 '가족과의 단절', '불확실한 미래' 같은 답변들이 나왔고, 한 학생이 '영어 실력의 부족'이라고 하는 순간, 오우!, 커다란 계단식 강의실 전체가 한 마음이 되는 광경이 벌어졌다.
생각해 보면 20대 때의 나도 그랬다.
나는 강원도 스키장 근처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오롯이 서울, 한국에서 마쳤다.
나와 영어와의 관계는 일방적이고 강압적이었다. 나는 영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영어 점수가 필요했다. 1996년 겨울 수능 3교시 영어 영역을 마쳤을 때 이제 더는 영어 시험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다.
외국계 회사에서 만난 동료/선후배들 중 영어능력자들은 99% 외국에서 유학하거나 유년기를 해외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업무 성과를 내면 싱가포르 등지의 아시아퍼시픽 오피스나, 드물게는 미국/유럽의 본사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그사세(그들만이 사는 세상)였다.
30대 중반에 덜컥 싱가포르 오피스행이 결정되었을 때, 기쁜 순간이 지나가자 나의 서툰 영어에 대한 엄청난 불안과 압박감이 몰려왔다. 당시에 일로 만난 광고회사 DDB의 김수진 상무님이 용기를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한국 사람이잖아요. 한국 사람은 반만 (일)해도 다른 나라 사람들 금방 따라잡아요." 이미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커리어를 쌓고, 이제 막 네덜란드행을 준비하던 해외 커리어계의 고수, 수진 상무님의 말씀이니 일단 믿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현실이 되었다.
10여 년 동안 해외에서 커리어를 쌓는 동안 나를 성장시켜 준 원동력은 영어가 아니었다.
문학이나 언론계를 제외한 일반적인 비즈니스 환경에서 필요한 영어는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시간을 들여 연습하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오히려 영어실력이 뛰어나도 업무 성과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뛰어난 인재를 다른 사람들과 구분 짓는 것은 언어 능력보다는 그 사람의 태도 (attitude), 또는 독특한 자질(characteristics)이다. 나는 한국인들의 성공 스토리에서 몇 가지 공통된 자질을 볼 수 있었다.
첫째, 한국인은 전체 맥락을 볼 줄 알고, 너와 나를 넘어서 '우리'라는 관계를 맺는다.
이에 비해서 서양인들의 사고는 직선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한 번에 한 가지의 주제에 집중하는 편이다.
9월 중순에 슬로베니아에 위치한 제조 협력사 EM(가명)에 방문했다. 우리 사업부의 제품이 EM 연간 매출액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니, 우리의 방문은 EM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구매부의 임원 폴(Paul, 가명, 벨기에)과 매니저, 그리고 현지의 협력사 담당자와 동행했다. EM에서는 CEO 마리안 (Marian, 가명, 슬로베니안)과 그의 경영진이 참석했다. 주요 안건은 비용 절감, 즉 EM에서 우리 회사로 납품하는 제품의 단가를 내리는 것이고, 지난 1년 간 이 주제에 대해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미팅 하루 전날 폴에게 물었다. "내가 마리안을 만나기 전에 특별히 주의할 일이 있을까요?"
폴이 말했다. "가능하면 그들에게 '파트너십'이라는 말을 쓰지 마세요. 나중에 골치 아파집니다."
폴은 제품 단가를 낮추기 위한 협상에 우리 회사의 우월적 지위를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 했다.
이튿날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약 7시간가량 마라톤 회의가 이어졌다. 중간에 실무진 간 날 선 말들도 오가고, 긴장이 이어졌다. 제품 단가 인하에 대해서 EM의 마리안과 경영진은 말을 아꼈다. EM이 코로나 이전에 감행한 대규모 투자로 인해 EM의 재무상태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긴 대화에서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 않자 폴은 다소 초조해 보였다. 공항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리안, 회의를 마무리하기 전에 저랑 따로 커피 한 잔 하실래요?" 나의 돌발 제안에 다들 흠칫 놀랐다.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마리안은 EM의 실질적 소유주로, 회사의 경영이 위기에 처하자 기존의 독일인 CEO를 해고한 후 경영일선으로 돌아왔다. 키가 훌쩍 크고 마른 체격인 마리안은 신사처럼 보이기도, 신경질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마리안의 개인 사무실로 안내된 후 나는 자기소개를 새로 했다. 글로벌 대기업의 사업부 대표가 아니라, 한국의 한 제조업 회사의 며느리로서. 창업주인 시아버지가 회사를 키워놓고 은퇴하셨지만 그 열정은 식지 않아서 아들들이 (그 중 한 명은 내 남편) 아주 힘들어 한다는 농담을 했다. 마리안이 남 얘기 같지 않다면서 껄껄 웃었다.
그리고 1년 전에 완성된 EM의 최신식 생산 라인이 첫 가동도 못하고 멈추어 있는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팠다는 말도 했다. (해고된 이전 CEO의 욕심이 부른 과대투자의 결과였다.) 진심이었다.
당장의 제품 단가 협상보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제품에 대한 소비자 수요를 늘려서 이미 투자된 신규 생산 라인을 하루빨리 가동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케팅 활동을 강화해서 소비자 수요 확대에 최선을 다할 테니, 마리안은 현장에서 제조 단가를 낮출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서로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되자고 했다.
네덜란드 사무실로 돌아온 다음날 마리안으로부터 긴 이메일이 도착했다. 진심 어린 대화가 고마웠다는 인사와 함께 자사 경영진들로부터 5가지 정도의 원가 절감 아이디어를 받았으니 바로 우리 쪽 실무진들과 논의를 시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폴에게 전달했다. 놀란 눈치였다.
폴에게 한국인은 '너'와 '나'를 넘어서 '우리'라는 관계를 만들 줄 안다고 귀띔 해주었다. 과연 알아들었으려나?
둘째, 한국인은 탁월함으로 가는 길인 꾸준함과 참을성을 초/중/고 최소 12년간 단련한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많이 있지만,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마친 대부분의 학생은 최소한 단단히 '버텨내는 힘'을 얻는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굴곡진 발, 골퍼 박세리의 하얀 발과 그을린 다리, 박지성, 손흥민, 김연아. 그리고 K-POP 스타들. 한국인의 탁월함과 그 성공 이면의 '묵묵히 꾸준히 참고 버텨내는 근성'에 대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여기 친구들 사이에선 암스테르담의 수많은 오피스 건물 중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은 한국인 (혹은 최소 아시안)이 일하는 곳이라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셋째, 한국인은 높은 기준과, 자신의 성공에 도취되지 않는 겸손함을 지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는 인생 선배님의 아우라가 너무나 멋진 윤여정 님이다. 그녀의 제93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이 오랜동안 화제였다.
"내가 어떻게 글렌을 능가할 수 있겠어요. 여기 5명 후보 모두 각자 다른 역을 연기했고, 우리 모두가 승자 winner입니다. 오늘 제가 여기 있는 건 단지 조금 더 운이 좋았기 때문이에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한국인'이라는 범주에 묶어버리는 것은 조심스럽다.
하지만 뭔가가 있다. 그것이 우리 혈관 속에 흐르는 DNA이든, 우리가 시대와 세대를 공유하면서 만들어낸 가치 value 이든 간에, 한국인들은 아시안적인 것과는 다른 우리만의 특징을 지닌다.
단편이 아닌 전체를 보는 넓은 시야, '우리'라는 관계 맺기, 탁월함으로 이어지는 꾸준함과 참을성, 높은 기준과 스스로에게 취하지 않는 겸손함. 이러한 태도과 자질이 한국인을 특별하게 만든다. 이것은 영어와 같이 '반복된 연습과 훈련으로 얻을 수 있는 기술'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것이다.
나는 한국의 젊은 인재들이 본인들의 잠재력을 믿었으면 한다. 익숙함을 떠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일단 밖으로 나와서 보면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더 잘 보이기도 하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다.
각자의 커리어를 신중하게 선택하되, 고작 영어실력 때문에 호기심과 용기를 거두지는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