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엄습할 때

소소한 테라피

by 어거스트


불안은 아무 때나 찾아온다. 엄습한다는 말이 딱 맞다. 예고 없이 훅 - .


지난 주가 나에겐 그런 한 주였다.

출장지에서 저녁식사가 무산되고 (나를 초청한 사람이 몸이 아파서 조퇴), 세 개의 노트북 충전기 중 두 개를 잃어버리고 (하나는 네덜란드 북쪽 연구소, 하나는 암스테르담 본사 회의실에서 발견) 할 때까지만 해도 그냥저냥 괜찮았는데, 결정적 한 방이 있었다. 내가 속한 비즈니스 유닛의 경영진 중에서, 그 존재감만으로도 나를 줄곧 압도하던 동료 바바라 (Barbara, 가명)가 나보다 먼저 승진했다.

음...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현재 보직에서 4년 차, 나는 4개월 차라는 차이가 있고 그녀의 사업부 규모는 내가 맡은 것의 두 배 가량 된다는 사실로 보아 이번 승진은 매우 마땅했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그녀를 축하해 주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내 마음에 훅 찾아온 불안이다. 이건 논리적 이해와는 완전히 별개다.

지금까지 20여 년의 직장 생활 동안 나는 줄곧 치고 나가는 편이었다. 네덜란드 본사에 온 후에도 나쁘지 않았다. 한국인으로서 단련된 묵직하게 노력하는 태도 덕분인지 금세 눈에 띄어 빠른 속도로 리더십 포지션에 올랐다.

그 이후에 커리어의 정체기를 겪었지만 잘 버텨냈고, 이제 막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찾아서 도약해 보려던 차였는데, '불안' 이 녀석이 다시 찾아왔다.


하나도 반갑지 않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쳐들어온 녀석이니 어쩔 수 없다. 달래서 내보내든지 어디 쪽방 같은 곳에 가둬두기라고 해야 한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바바라와 함께 일할텐데, 그녀를 볼 때마다 열등감과 불안함에 시달리도록 나를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1단계.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1) 이곳 내가 속한 글로벌 본사의 경영진 포지션은 스포츠로 치자면 세계 선수권대회 같은 곳이다. 여기에 초대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1등이 아니라고 좌절하지 말자.

이러면서 김연아 선수 인터뷰 영상들을 돌려봤다. 제일 좋아했던 부분은 아사다 마오가 트리플 악셀을 성공하고 마오의 코치가 김연아 선수 앞에서 오만방정을 떨면서 멘털을 흔들려고 했을 때 김연아 선수가 보여준 '풋' 하는 코웃음.

그리고 결국 김연아 선수가 보란 듯이 그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아.. 나는 김연아 선수가 아니다.


2) 바바라는 그녀의 능력치에 탄복하는 나에게 줄곧 말했었다. 자기는 이전 회사에서 4년간 지금과 똑같은 일을 했었고, 지금 여기서도 4년 차가 되었으니 돌아가는 일을 빤히 알고 있는 건 너무 당연한 거라고. 그리고 그녀는 내가 지켜본 지난 3년 동안 수차례 승진에 도전하고 실패했다. 이번 승진은 그녀에게 칠전팔기 같은 승리이다. 그러니 더 축하할 만하다. 그. 러. 나...

한국의 지사에서 업무를 시작해서 아시아퍼시픽 본부, 그리고 본사의 경영진으로 올라오기까지 나는 매 3-4년마다 근무 지역이나 업무를 바꿔왔다. 그래서 두루두루 경험했고 인맥도 쌓았지만, 나이도 부지런히 먹었다. 나보다 네댓 살이 어린 바바라의 성장을 보면서 내가 너무 돌아서 왔나 하는 약간 초라한 마음이 생기는 걸 피할 수가 없다. 마음 한구석에 내가 '나이만 많고 능력치는 부족한' 사람의 부류에 속하게 될까 봐 무서운가 보다. 갑자기 울고 싶다.



2단계. 했던 거 해보기.


머리로 생각해서 답이 나오지 않아서 그동안 나는 어떻게 버텨왔었나, 나의 생존 전략들을 되짚어보았다.


3) 책을 읽자. 내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독서는 나에게 현실에서 잠시 멀어질 수 있는 휴식을 주곤 했다. 그래서 방 안을 둘러봤다. 여기 찔끔 저기 찔끔 읽다가 만 책들 네댓 권이 눈에 띄었다. 하나를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지만 진도가 잘 나가지 않고,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에 조바심이 났다. 더 불안하다.


4) 다른 사람의 성공에 기여하는 좋은 사람이 되어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가져보자. 매주 목요일은 내 보고라인의 팀장들과 일대일 면담을 한다. 이번 주는 업무에 대한 이야기는 줄이고, 그들의 열정, 목표, 성장에 대한 이야기로 채웠다. 이런 대화들은 확실히 서로에게 좋은 에너지를 준다. 나와 같은 마을에 사는 (옆옆옆집이 그녀의 집) 직원과는 동네 공원을 함께 산책하면서 대화를 했더니, 금세 소문이 나서 금요일인 어제 미팅 시간에 집으로 찾아온 직원도 있었다. 30분 동안 숲 속을 걸으면서 나눈 신나는 대화. 너무 좋았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금요일 오후에 들어온 이메일을 쭉 살펴봤다.

오전에 바바라가 진행하고 나도 참석한 회의의 회의록이 올라왔고, 회사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는 그녀의 노력과 리더십을 칭찬하는 보스의 회신이 따라왔다. 아.. 다시 초라한 마음이 요동친다.



3단계. 안 해본 거 하기.


5) 글을 쓰자. 브런치에 글을 쓰고 나면 마음에 뿌듯함이 올라오곤 한다. 내가 들인 시간과 애정의 아웃풋(생산물)을 보는 것은 일에서나 일상에서나 언제나 만족감을 준다.

오늘의 새로운 시도는 찌질한 내 모습을 드러내기이다. 그동안의 글도 멋있어 보이려고 쓰진 않았지만, 마음이 요동치는 날에는 굳이 글을 쓰지 않았었다. 그래서 오늘의 시도는 새롭다. 쓰는 동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이럴 때 '자유하다'는 표현을 썼던 것 같다. 내 마음이 약간 자유하다.


6) 사과나무를 심자. 당장 나에게 열매를 주는 일들은 아니지만 미래의 나에게 선물이 될지도 모르는 일들을 하나둘씩 해보자.


첫 번째. 나는 늘 마음에 학교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학창 시절의 그리움'은 절대 아니고 (절대 아님 주의), 학교라는 공간이 주는 싱싱한 에너지에 대한 그리움이다.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주는 에너지. 그래서인지 지난 4월에 하버드 대학교에서의 짧은 일정이 그렇게도 좋았고, 다음 달 서강대학교에서 할 강의가 기다려진다. 그래서 오늘은 모교 교수님께 오랜만에 연락을 드려보려 한다. 학생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도 내어 보이고, 모교 학생들 중에 네덜란드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친구들이 우리 회사에서 인턴십을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겠다는 제안도 하려고 한다. (왜 아직까지 이 생각을 못했을까!)


그리고 두 번째. 다소 뜬금없지만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면 주식 계좌를 열어서 생애 최초로 주식을 조금 사볼까 한다. 회사에서 받는 스톡옵션을 제외하곤 한 번도 내 손으로 주식 거래를 한 적이 없다.내가 경영진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회사의 주식만 골라서 아주 조금만 구매할 예정이다. 어차피 큰돈도 없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나는 마음이 어지러울 때 미래를 위한 사과나무를 심을 줄 아는 사람이다. 훗.





이제 둘째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가기 위해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다시 일상으로.






Image: © Mykyta Dolmatov/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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