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나는 우리 회사의 한국 지사에 마케팅 경력직 차장으로 입사했다.
당시의 나는 영어 실력과 무관하게 (영알못) 해외 근무에 대한 동경이 있었서 인사 평가 시즌 때마다 기회를 달라고 회사에 어필했었다. 어디서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가 건방지게 짐 싸서 나가겠다는 소리를 하냐고 상사로부터 대차게 욕을 먹은 적도 있지만, 아무튼 내 할 일 열심히 하면서 삼 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발령이 났다. 아시아 퍼시픽 (APAC) 본부가 있는 싱가포르로 가란다.
절대 못 보낸다고 반박하던 한국인 보스의 목소리가 방 밖으로 새어 나왔던 정황으로 보아, APAC 본부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모양이었다. APAC 사장의 직접 등판으로 상황 종료.
기대 반 설렘 밤으로 싱가포르에 도착해 보니 예상치 못한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 전임자로 소개되었던 미국계 네덜란드인 밥 (Bob, 가명)의 근무 상태는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의 업무 성과와 근무 태도의 문제로 회사는 그에게 업무 종료를 알렸지만, 그는 사표 쓰기를 거부하고 매일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 미해결 상황에 내가 플러스 원으로 얹힌 것이었다.
밥은 나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해주기는커녕, 하루는 나를 유령 보듯이 하고, 다른 날은 나를 붙잡아두고 본인이 동남아시아를 다니면서 활약한 무용담을 종일 늘어놓았다. 둘 다 업무는 제쳐 놓고 있던 셈.
무시하는 듯했어도 자식들 셋이나 끌고 싱가포르로 날아온 나의 존재가 압박이 되었는지, 회사에서 다른 협상안을 내놓았는지, 밥은 내가 도착한 지 한 달쯤 되던 날 조용히 짐을 쌌다.
밥이 나가고 온전한 내 자리를 찾으면서 안도가 되었지만, 밥과 나를 그렇게 놔둔 회사의 처사가 두고두고 언짢았다. 아무리 업무 성과가 나쁘기로서니 그렇게까지 밥을 비참하게 만들어야 했을까.
진짜 내막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모른다. 철저한 비밀 유지. 다만,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이 그 당시 APAC 경영진과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닌지 고민스럽다.
싱가포르에서 3년을 보내고 나서 나는 8년 전 네덜란드 본사로 옮겨왔고 최근에 한 사업부의 글로벌 헤드가 됐다. 싱가포르에서 도드라진 성과를 내고 그 보상으로 본사로 보내졌으니, 당시 나와 밥을 고통스럽게 했던 경영진의 복안은 나름 의도한 대로 작동한 셈이다.
새로 맡은 사업부의 내 직속 보고라인에는 각 제품 카테고리를 담당하는 디렉터/팀장들이 있다. 탕(Thang, 가명)은 그중 한 명으로, 이제부터는 탕의 이야기다.
시작은 좋았다. 탕은 농담을 잘하고, 나보다 열 살이 많았지만 새로 보스가 된 나를 따뜻하게 환영해 줬다. 올해 초여름 홍콩 출장길에 Type-A 독감에 걸려 (거의) 사경을 헤매는 나에게 약이며 체온계이며 살뜰하게 챙겨준 사람이 탕이다.
문제는 그녀의 성과와 근무 태도, 그리고 리더십에 있었다.
첫째, 그녀의 제품 카테고리는 수년 째 매출이 하향 곡선이었고 이익은 사업부 내에서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둘째, 그녀의 프로패셔널리즘에 대한 경고를 사전에 듣긴 했지만, 직접 본 그녀의 근무 태도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사전에 공지된 전략 보고 회의에 그녀는 팀을 전원 대동하고 맨몸으로 나타났다. 말로 때우려던 셈. 회식 자리에서는 온갖 이야기로 화기애애하던 탕의 팀원들은 회의실에만 들어오면 입을 닫았다. 모든 회의와 보고는 탕의 (알맹이 없는) 독무대였다.
셋째, 사업부에서 진행한 크고 작은 보고 일정과 자료 취합에서 탕의 팀은 자주 마감을 어겼다. 다른 팀장들은 데이터 분석이나 자료 취합과 같은 일들을 팀원에게 위임하는데, 탕은 굳이 그런 일들을 도맡았고 제때 마무리하지 못했다. 본인의 팀원들은 업무 과부하가 심해서 도저히 더 일을 줄 수 없다고. 팀을 리드하지 못하는 리더인 셈이다.
지난 3개월 동안 부드럽게도 얘기하고 강하게도 얘기하면서 탕에게 피드백을 주었다. 그리고 탕의 태도에도 조금씩 변화가 있는 듯했다. 나는 애써주어서 고맙다고 폭풍같이 칭찬을 퍼부었다.
하지만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고 했나. 곧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졌고, 나와 동의한 일을 뒤에 가서는 다르게 진행한 상황들이 연달아 발견되었다.
처음엔 탕의 팀이 과부하 상태인 것이 염려되어 매니저급 직원의 추가 채용을 검토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직원의 수가 아니라 탕의 리더십과 업무 역량이라는 결론에 금방 도달했다. 리더가 제 역할을 못하는 팀에 팀원을 늘려주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당근 대신 채찍을 택했다. 탕과 같은 디렉터 직급의 야라 (Yara, 가명)를 공동 팀장으로 투입하고 탕의 권한을 반으로 줄이기로 했다. 탕에게 보내려고 했던 매니저는 야라에게 보내고, 현재 탕의 팀원들도 탕과 야라에게 나누어 보고하게 된다.
사내 커뮤니케이션은 의례히 그렇듯, 중립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로 나갈 예정이다. 탕의 제품 카테고리의 성장 잠재력이 매우 크므로 (사실임!) 두 개의 팀이 각각의 프로젝트에 온전히 집중하도록 돕는다는 내용. 탕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회사가 주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아채고 야라와의 경쟁을 자극제로 삼아 각성할 수 있을까.
야라는 과거 싱가포르에서 내가 했던 역할을 맡는 셈인데,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그 판을 못 보고 들어갔고, 야라는 정확히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리하고 승부욕이 강한 야라는 이 기회에 본인의 능력을 증명해서 (탕을 제치고) 한 단계 더 올라가겠다는 의욕으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인사부와 함께 내가 승인한 계획인데 참 별로다.
성과는 내고 싶지만 탕에게 상처 주는 사람은 되기 싫다.
일전에 서울에서 만난 한 선배가 그런 말을 했다. 기업에서든 어디에서든 리더 역할 하려면 좀 소시오패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아닌 게 아니라 구글에 '리더 + 소시오패스'를 검색해 보니 관련 문서가 14만 건이 나온다. (0.4초 만의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