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엔가 나의 보스 (50대 중반, 프랑스인, 남자)가 식사를 하다 말고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오늘 오전에 사무실에서 웬 처음 보는 아프리카계 남성이 나에게 와서 아는 척을 하더니 시간 되면 커피나 한잔 하자는 거야. 내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누구시냐고 했더니 새로 온 인턴이라더군. 허! 참!"
그러니까 나의 보스로 말할 것 같으면 글로벌 대기업인 우리 회사의 경영진 중에서도 탑 티어에 계신 분으로써, 디렉터 (부장-이사) 급인 내 직속 부하들도 준비 없이 대화하기를 어려워하는, 소위 '높은 분'이다.
회사의 임원들도 비서를 통해서 면담을 신청하는 (그리고 바쁜 스케줄 때문에 거절당하는) 일이 일상인 그분에게 인턴이 가서 커피나 한잔 하자고 했다니. 이 신선한 에피소드는 "요즘 MZ 세대들이란... 하! 하! 하!"로 어색하게 마무리됐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인턴이 본인의 캐릭터와 우리 회사의 색깔이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사하여, 보스와의 커피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도 올 것이 왔다.
휴가에서 복귀 후 바빠서 숨넘어가는 나의 일정표에 티나 Tina 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쥬엔 (Duyen)이 보낸 초청장이 와있었다. 당최 티나는 누구이고 쥬엔은 누구인가.
이메일 발신자인 쥬엔의 이름을 더블 클릭하니 우리 사업부의 직원이다. 직속 매니저를 불러 물어보니, 내 휴가 중에 첫 출근을 한 인턴인데 쥬엔이 티나이고 티나가 쥬엔이란다. (넹?)
나에게 자기소개 겸 인사를 하려는 것 같으니, 시간이 되면 환영과 격려를 부탁한다길래 가볍게 오케이 okay! 하고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베트남에서 온 이십 대 중반의 유학생으로 네덜란드의 좋은 학교에서 학부를 마쳤다고 한다.
간단한 자기소개 후...
대화 # 1
나: 그런데 쥬엔. 예쁜 베트남식 이름을 놔두고 왜 티나라고 부르라고 하죠?
쥬엔: 여기 친구들은 이미 나를 티나로 알고 있고, 나도 티나가 편해요. 서양인들한테 쉬운 이름이기도 하고요. 원숙도 티나라고 부르면 돼요.
나: 음.. 그런데 쥬엔, 아니 티나는 우리 사업부의 인턴이잖아요. 앞으로 매니저들을 도와서 세계 여러 나라의 최소 수십 명과 효율적으로 소통해야 할 텐데, 그 모든 사람들이 두 가지 이름을 외울 수 있을까요? 회의에서 티나를 만난 사람들이 티나에게 이메일을 보내려면 시스템에서 쥬엔을 검색해야 하잖아요.
쥬엔: 아, 나는 상관없어요! 그럼 편하게 티나로도 쥬엔으로도 불러주세요!
나: ?
나: 음... 매니저인 필립에게 이 부분을 상의하고 이메일을 티나로 고치던지, 회사 내에서는 본명인 쥬엔을 쓰도록 해요.
쥬엔: ???
대화 # 2
나: 티나가 (어쩐지 설득당해서 이미 티나로 부르고 있다) 적극적으로 다가와 주어서 고마워요. 인턴 생활 동안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될까요? 앞으로 6개월 동안 무엇을 이루고 싶죠?
쥬엔: 새로운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나: 하하... 좋아요. 업무와 관련해서 특별히 관심 있는 분야가 있을까요? 다음 커리어 개발에 도움이 되는 경험을 쌓도록 배려해 줄 수 있을 거예요.
쥬엔: 아, 저는 주어진 일은 뭐든지 열심히 하려고요. 특별히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일은 아직 없어요. (해맑) 사실 이런 걸 물어본 사람은 원숙이 처음인데, 천천히 생각해 보고 인턴을 마칠 때쯤 알려줘도 될까요?
나: (응?)
대화 # 3
나: 그럼 우리 회사에서 티나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걸까요? 전공이나 관심사와 관련해서 '이런 분야의 일은 티나에게 맡겨달라!' 할만한 거요. 예를 들어서 이전 인턴은 데이터 사이언스를 전공한 학생이라서 엑셀에 간단한 코딩을 넣어서 쉽게 데이터 분석을 하곤 했어요.
쥬엔: 아, 네. 제 장점은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밝은 성격과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열정이죠. (다시 해맑)
나: 음... (정신을 가다듬고) 티나처럼 밝고 열정적인 사람이 우리 팀에 와서 참 기뻐요. 티나도 나도 아시아 여성이잖아요. 그래서 더 반갑고, 나는 티나와 같은 젊은 아시안계 여성 인재들이 기업에서 잘 성장하도록 항상 돕고 싶어요.
우리가 아시아를 비롯한 글로벌 사업을 하고 있지만 여기 본사에서, 특히 위로 갈수록 아시아계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어요.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요.
쥬엔: (크게 공감하는 표정으로 끄덕끄덕 다 듣고 나서) 어... 가족 없이 혼자 사세요?
나: (응?)
이렇게 일관되게 엉망진창인 대화라니!
인사부에서 임원들에게 MZ세대를 이해해야 한다며 각종 아티클과 교육 일정을 들이밀 때 나에게는 2000년대에 태어난 삼 남매가 있다며, 그들과 17-18년을 동고동락한 나에게 세대 간 교육은 필요 없다고 오만을 부렸었다. 반성.
아직 한국에서 여름을 즐기고 있는 막내가 돌아오면 나와 쥬엔의 대화에 대한 MZ세대적인 해석과 조언을 구해야겠다. (꼰대라고만 하지 말아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