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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가명)는 루마니아 여성으로 30대 중반의 시니어 매니저 (과-차장급)다. 우리 회사에서 만나는 동유럽 출신 여성들이 대부분 파이팅이 넘치는 스타일인데 반해, 빅토리아는 조용조용하다. 굳이 찾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를 정도.
내가 처음 빅토리아를 만난 건 4년 전쯤 다른 사업부에서 일할 때였다. 내 직속 팀원이 아니어서 가끔 일하다 마주치는 정도였는데 결혼과 임신, 첫 아이의 출산 이후 긴 출산 휴가에 들어갔고, 내가 사업부를 옮기면서 그녀가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다시 그녀의 이름을 듣게 된 것은 사업부 팀장들과의 직원들 성과 리뷰 (performance review) 미팅에서였다. 그녀도 시간 차를 두고 내가 있는 사업부로 옮겨왔는데, 팀 이동 직후에 다시 둘째의 출산 휴가에 들어갔고, 이제 복귀한 지 6개월쯤 되었지만 전혀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인사부를 동반한 팀장 회의에서 그녀가 우리 사업부 내 정리 대상 1호로 지명되었고, 그녀의 직속 팀장은 필요한 절차를 밟기로 했다. 서면 피드백, 면담, 개선 방안 협의, 그리고 모니터링. 세 번의 피드백 이후에도 눈에 띄는 성과 개선이 없으면 해고가 수순이다.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일하는 젊은 엄마라면 일단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 비슷한 게 발동한 나는 그녀와 면담을 자청했다.
나랑 화면을 두고 마주 않은 그녀는 단단한 껍질 속에 잔뜩 몸을 웅크린 딱새우 같았다. 보스의 보스인 내가 불편해서였는지, 힘든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건지, 나의 질문과 관계없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늘어놓기 바빴다. 본인은 너무나 행복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고, 더 열심히 할 작정이란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 여지를 주지 않는 그녀를 보면서 안쓰러웠지만, 더 이상은 서로의 시간 낭비겠다 싶어서 대화를 접었다. 그리고 직속 팀장에게는 계획된 프로세스를 진행하라고 알렸다. 그게 한 달 전쯤이다.
휴가에서 돌아와 이번 주 일정표를 보니, 그녀의 면담 신청이 들어와 있었다.
휴가 중 쌓인 이메일과 밀린 업무들로 정신이 없었지만, 일단 겹치는 다른 일정 몇 개를 거절하고 금요일 오후인 오늘 그녀와 다시 마주 않았다.
그녀는 팀장으로부터 두 번째 같은 피드백을 받은 후 스스로를 돌아봤고, 지금 담당하는 프로젝트를 회사의 기대 수준에 맞게 해낼 자신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
나: "그동안 얼마나 애쓰고 마음고생을 했을지 느껴지네. 많이 힘들었어요?"
빅토리아: "나는 둘 다 잘하고 싶었어요. 엄마의 역할도, 프로젝트 매니저의 역할도요. 미리 계획을 잘 세워보려고도 했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언제 아플지, 언제 잠을 보챌지 미리 알 수가 없고,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언제 어디서 문제가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항상 불안하고 어디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철벽 방어를 하던 지난번 면담과 다르게 그녀의 말문이 트인 건 반가웠지만, 마치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축 쳐진 모습이 안타까웠다.
엄마와 직장인의 두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다는 건 절대 불가능에 가까운 걸 나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 또한 세 아이를 낳고 나서 꾸역꾸역 회사에 다녔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울었다. 내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인가, 꼴사납게 자기 연민에 빠진 건가 하면서 나를 탓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산후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나: "누구도 두 가지를 동시에 잘할 수 없어요. 한 번에 하나를 잘하려고 애쓰는 것도 힘든걸요. 절대로 빅토리아 자신을 책망하지 마세요.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빅토리아: "나를 탓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껴져요.. (울먹)"
분위기를 바꿔야겠다.
나: "참, 그럼 둘째가 거의 한 살 되었겠네요? 첫째랑 거의 터울이 없죠? 딸들은 잘 커요?"
빅토리아: (울먹이며 아래로 향해있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들고 카메라를 보더니 커다란 눈이 더 커진다)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예쁜 애들이에요. 정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애들하고 있으면 너무 행복해요. 이번 주말에도 애들한테 새로운 장난감과 게임을 만들어줄 생각이에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빅토리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빅토리아의 딸들은 엄마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있구나. 빅토리아는 내가 우리 애들을 키우면서 놓쳐버린 많은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렇게도 애쓰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한쪽이 아렸다.
나: "와.. 나도 빅토리아의 딸이 되고 싶어요!"
내 뜬금없는 농담에 빅토리아가 눈이 촉촉한 채로 웃었다.
현재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는 남편의 소득 상황이 불안정해서, 빅토리아가 어떻게든 일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회사에서 빅토리아가 이동할 수 있는 자리를 적극적으로 알아봐 주는 것을 약속하면서 면담을 마무리했다. 마케팅 팀의 프로젝트 리더 자리는 내려놓고, 예측 가능하고 정해진 시간 동안 일을 할 수 있는 다른 직군으로 그녀를 옮겨줄 생각이다.
아이들이 좀 더 자라고, 빅토리아의 마음에 다시 열정적으로 마케팅 업무를 하고 싶다는 불이 지펴지면, 언제든지 다시 돌아오라고 덧붙였다. 미래의 일을 내가 보장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돕겠노라며.
내가 선배 워킹맘으로서 얼마나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인지 자랑하려고 쓴 글이 아니다.
지금보다 한참 전에 내가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뾰족했고, 자기 연민과 세상에 대한 내적 분노 (세상 = 남편, 시댁, 회사 사람들 포함) 사이를 오락 가락 하며 살았다.
직원 채용 면접에서 본인이 할 업무보다 출퇴근 시간과 휴가 일수를 더 궁금해하던 후보자 (아기 엄마)를 탈락시키면서 그녀의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었다.
동시에, 아기가 아파서 조퇴하는 선배 언니의 뒤통수에 대고 "엄마가 집에 가면 아픈 애가 낫기라도 하니?"라고 쏘아붙이던 팀장 (그녀 또한 엄마였다!)을 두고두고 혐오했다.
나와의 화해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세 아이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남편과 나는 늘 "내 탓이요" 모드였다. 애가 시험을 망치고 오면 '우리가 애들을 너무 이 나라 저 나라 끌고 다녀서 그래' 하고, 애가 사춘기인지 중2병인지 때문에 문을 쾅 닫고 대화를 거부하면 '애들 어렸을 때 맨날 회사일 한다고 지쳐서 애들한테 짜증 내고 그래서 그런가 봐' 이런 식.
어느 날 남편과 동네 산책길에서 또 반성모드를 켜는 남편을 보면서 갑자기 '이만하면 됐어. enogh is enough'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의 소리치듯 말했다.
"오빠, 스탑! (stop) 아니, 잘 생각해 봐. 우리 정도면 진짜 좋은 부모 아니야? 우리가 서툴긴 했지만 언제 한 번이라도 애들한테 진심이 아닌 적 있었어? 한 번이라도 정말로 애쓰지 않은 적 있었냐고. 우리가 노력한 걸로는 세계 최강일걸?" 그리고 결론 냈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다하고 있다. 죄책감은 이제 그만.
그 후부터 일하는 엄마들의 고충이 눈에 더 들어왔다. 독하게 성과를 내면서 날아다니는 직원이든, 빅토리아처럼 힘들어하는 직원이든, 모두가 애쓰고 있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사회 시스템이 잘 되어있든 아니든 간에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두 가지 역할에 쪼개 써야 하는 워킹맘들은 어디에서나 힘들고 별 것 아닌 일에도 죄책감을 느끼면서 산다.
그녀들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잣대를 들이밀면서 함부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해주었으면 한다. 꼭 엄마나 아빠로서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았더라도 많이 애쓰고 있는 어린 엄마들을 머리로라도 이해하고 배려해주었으면 한다.
한결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의 빅토리아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빅토리아, 주말 동안 딸들과 정말 좋은 시간 보내. 너도 좀 쉬고. 일하는 엄마로 사는 동안 힘든 일이 종종 생기겠지만, 자기 자신에게 친절함을 잃지 말자. 우린 애쓰고 있으니까."
세상의 모든 워킹맘들,
응원합니다. 다 잘될 거예요. 이 또한 지나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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