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년 여름 서울에 간다. 아이들의 여름 방학을 일 년 내내 기다리고 계시는 양가 부모님께 세명의 손주들을 데려다주는 것이 주요 임무. 코로나 기간에도 예외는 없었다. 자가 격리가 끝나면 아이들을 부모님 댁에 맡기고 얼른 네덜란드로 돌아와서 나의 진짜 여름휴가를 시작하곤 했다. 네덜란드의 텅 빈 집에서 누리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올해의 서울행은 달랐다. 가족의 의무에 더해 '나의 여행'을 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그리웠다.
처음 계획은 열흘이었다. 하지만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와 갑자기 생긴 서울에서의 미팅 일정들로 사나흘이 뭉텅 잘려나가 버리자, 에잇! 하는 마음에 일주일을 더해버렸다. 무려 17일간의 서울 스테이. 많이 만나고, 많이 웃고, 엄청 많이 먹으면서 무척 행복했다.
네덜란드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좋은 기억들 속에서도 유독 마음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나와 비슷한 길을 가고 있거나 몇 발짝 앞서 걸어간 선배들과의 좋은 대화들. 시간이 지나도 잊고 싶지 않아서 짧게 기록해두려고 한다.
(성함은 이니셜로 대체)
1. JL. 전략 전문가
"복잡한 일 아니잖아요."
최근 새로 맡은 일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고, 잘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발만 동동거리는 기분이라는 나에게 그가 던진 말이다. 그러게요. 내 업은 단순하다. 좋은 기술로 좋은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일. 뭐가 그리 복잡하고 어렵겠나. 본질에 집중하고 단순하게 생각하자.
2. JK. 경영자
어떤 후배들을 후임으로 키우고 계시냐는 나의 질문에, "실행력. 말로 떠드는 건 누구든 하는데, 그걸 실행하는 사람은 드물어. 문제는 기업에서 실행이라는 건 혼자서 못하거든. 다른 사람들을 움직여서 실행하는 능력. 그걸 보여주면 다음 단계로 가는 거지."
또 다른 말씀은 뭔가 핵심이 있는 듯한데 아직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일단 적어보고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다. "공감 empathy 은 자기가 원하는 걸 알고 난 뒤에 할 수 있는 거야. 자기가 뭘 하려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직원들하고 공감할 수 없어."
3. HG. 임원
"내 생각이 맞아요. 내 생각대로 하세요." 어찌 들으면 꼰대 같은 이 말에 통찰이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말과 힘에 따라 움직일 거라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내 자리에 앉혔겠지. 내가 믿는 최선의 길로 나답게 이끌어가자.
"빵을 구워도 아이들이 아닌 나를 위해서 굽고, 골프를 쳐도 업무가 아닌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치세요." 나의 몸과 마음을 항상 먼저 돌보라는 말씀. (저는 빵도 구울 지 모르고, 골프도 칠 줄 모릅니다만. ㅎㅎ)
4. DK. 경영자
어떻게 해서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으냐고 묻는 좌중의 어린 후배의 질문에 그녀가 한 말. "작은 일이라도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아주 잘 해내면 누군가는 반드시 알아챕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용기를 내어 Yes 하세요."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의 사회 초년생 시절 마케팅 샘플링을 하던 일화를 들려줬는데, 듣고 있자니 기분이 새로웠다.
경력이 쌓이고 회사 내에서 지위가 올라가면서 '나의 일' 보다는 '우리 팀의 일, 내 직원의 일'에 더 신경 써온 건 아닌지. 한 사업부를 책임지는 '나의 일 (역할)'이 무엇인지, 이걸 아주 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업무 복귀 전에 조용히 다시 생각해 보려고 한다.
5. SC. 마케팅 전문가
나의 스타 선배님. 이 분과 알게 된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일하는 엄마로 살아온 길이 서로 비슷해서 왠지 연결된 기분을 느낀다. 최근에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 딸과의 대화를 들려주셨는데, "우리 딸이 지금 인턴쉽을 준비하고 있는데, 문득 '일하는 엄마를 두었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아'는 말을 하더라고요." 다른 친구들은 사회생활에 앞서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빠나 다른 남성 선배들이 대부분인데, 자기는 엄마가 그 길을 갔으니까, 엄마가 선배로서 조언을 해준다는 게 쿨 cool하고 감사하더라는 이야기. 이게 뭐라고 마음이 뭉클해지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의 지나간 시간과 앞으로 닥칠 고생길이 미리 보상받는 기분이다. 그래, 나는 이방식대로 가치 있는 엄마야.
내가 좋아하는 유투버 돌돌콩님이 '저널을 쓰는 것은 나의 데이터를 쌓아가는 일'이라고 했다. 나중에 지난날을 돌아보았을 때 내가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과거의 내가 남긴 기록을 보는 일이라고.
내일이면 휴가를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한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겠지만 한 번씩 서울에서의 기억, 선배들과의 대화를 돌아보면서 마음 추스르고 또 한 걸음씩 나아가고 싶다. 내 나이 40대 중반을 지나가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성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