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탈 게임

보스턴 마라토너

by 어거스트

마리안 Marian은 다부진 체격의 루마니아인 중년 남성으로, 우리 사업부의 HR 헤드이자 나의 좋은 동료이다. 우연히 시작한 마라톤 덕분에 100킬로가 넘는 고도 비반에서 벗어나 지금의 FIT 한 몸을 가지게 되었다는데, 그가 지금과 같은 하드코어 마라토너가 된 계기는 살짝 더 드라마틱하다.

어느 날 평소처럼 마라톤 훈련을 마치고 집에 와서 샤워를 하려는데 마리안의 아내가 그의 등에서 이상한 혹을 발견했다고 한다. 검사 결과 피부암이었다.

마라톤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살집에 묻혀있던 혹들을 발견하지도, 제 때에 수술을 받지도 못했을 거라며,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마리안의 표정과 목소리는 사뭇 비장해진다. 마라톤은 마리안에게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2주 후면 세상 모든 마라토너의 로망이라는 보스턴 마라톤이 열린다. 마리안은 진작에 출전 자격을 얻었다. 나도 같은 주에 외부 교육 프로그램 참석차 보스턴에 갈 예정이라 마리안과 내가 만나면 자연스럽게 보스턴 얘기를 한다. 지난 금요일에도 그랬다.


나: 헤이, 준비는 잘 돼 가시나요, 마라토너님?

마리안: 완전 컨디션 최상이지. 3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건 문제없을 것 같아. 문제는 몸이 아니라 멘탈이야.

나: 왜?

마리안: 보스턴 마라톤에는 악명 높은 난코스가 있어. 들어봤어? 이 보스턴 마라톤 코스가 시내를 관통하는 게 아니라 보스턴 주변을 돌아가는 건데, 그중에 웰즐리 여대 캠퍼스를 지나거든.

나: 오홍, 웰즐리 대학이라면 힐러리 클린턴이 나온 그 명문 여대! 알지 알지 들어봤지. 그런데 왜?

마리안: 그 여대생들이 죄다 몰려나와서 마라토너들에게 kiss를 한다고. 게다가 소리는 또 얼마나 질러대는지, 그 코스를 "비명 터널 scream turnnel"이라고 해.

나: 오우, 와우~ (... 각종 농담 생략...)

마리안이 말하는 보스턴 코스의 최대 위기는 여대생들이 퍼붓는 키스가 아니었다. 그냥 지나치면 그만일 뿐. 문제는 그 분위기란다. 코스의 중간, 20킬로미터 지점 근처에서 만나는 현장의 흥분, 비명, 웃고 달려드는 인파들. 그 분위기에 휩쓸려 본인의 페이스를 잃어버리면 남은 절반의 코스가 무척 힘들어질 거라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비장하게 강조하길 "원숙. This is A mental game. 이건 완전 멘탈 게임이야."


옆에서 무슨 난리 법석이 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것. 내가 정해 놓은 목표 지점을 향해, 내가 준비한 그대로 집중해서 나아가는 것. 그걸 하는 자와 하지 못하는 자 사이에 성공과 실패가 갈릴 거라고 말하는 마리안에게 내가 대꾸했다. "그거 인생하고 똑같잖아!"




어떤 날은 자신감이 넘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눈앞에 보이고, 금세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다 이내 어떤 사람의 말 한마디,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에 갑자기 앞이 부옇게 변하고 불안이 엄습한다. 꼭 그런 날엔 말도 헛나가고 세상에서 나만 바보 멍충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을지 굳이 와서 말해주는 사람들에게 "내 한계를 왜 당신들이 정하는데?" 할 수 있는 배짱 (얼마 전 재미있게 본 드라마 '대행사' 고아인 상무(이보영 역)의 대사), 주변에서 들리는 말들, 크고 작은 일들에 "그건 나랑 상관없잖아" 하고선 가던 길 가는 단단한 멘탈을 갖고 싶다.


마리안이 보스턴 마라톤에서 돌아오면, 그 광란의 비명 터널을 지나면서 스스로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는지 꼭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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