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회사 승진의 정석
마리 Marie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으로 금발에 작은 체구를 가졌다. 찰랑거리는 똑 단발에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소유자. 지난해에 첫아기를 출산했고 어림잡아 갓 30대에 진입했을 텐데, 독일 사장 자리를 거쳐 2년 전에 유럽 지역 전체의 대표가 되었다. 아무리 성과 중심의 유럽 회사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초고속 승진은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시계를 3년 전으로 돌려보면, 당시 우리 회사는 유럽 시장의 구조조정을 위한 기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구조조정의 핵심은 7개의 국가 혹은 지역으로 나누어진 유럽 시장을 하나의 지역으로 통합하는 것. 이럴 때 가장 위험한 자리는 7인의 사장들, 그리고 그들의 경영진이다. 7개의 자리가 사라지고 1개의 자리만 남게 되니, 잃을 게 많은 사장단들이 꽤나 술렁거렸다.
나는 비밀 유지 각서를 쓰고 해당 프로젝트의 일부에 참여했는데, 새 조직의 프로세스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마리를 만났다. 워크숍 후반에 내가 프레젠테이션을 하러 단상이 올라가서 좌중을 둘러보는데, 다들 잔뜩 찌푸린 얼굴로 새로운 변화를 마뜩잖아하는 와중에 오직 마리만 생글생글하면서 나랑 눈을 맞추고 웃고 있었다.
이후 본사에서 이어진 후속 회의에서도 마리는 눈에 띄었다. 모두들 회사의 미래를 걱정하는 양, 어떻게든 변화의 폭과 속도를 줄여보려 열변을 토하는데, 마리는 달랐다. 그녀의 생각과 발언은 모두 유럽 시장이 통합된 6개월 후에 맞추어져 있었다. 마치 본인이 이미 유럽 사장이 되어있기라도 한 듯이. 사실 당시 마리는 막 독일 사장이 되었는데, 20대 후반에 마케팅 경력밖에 없는 마리에게 유럽의 가장 큰 시장인 독일 사장자리가 주어진 데에 이런저런 말이 많았고, 어떤 면에서는 다소 마리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있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운 조직이 발표되던 그날. 짜잔. 마리가 유럽 사장 자리에 올랐다.
세상엔 커리어 관리와 승진하는 법에 대한 조언들이 넘쳐난다. 책, 유튜브 비디오, 팟캐스트, 선배들의 말씀 등등. 나의 배경과 처한 상황에 따라서 와닿는 것과 아닌 것이 있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려 보이는 것들도 있다.
지난 20여 년간 외국계 회사의 지사와 본사에 근무한 나의 커리어에 비추어보면, 그래도 꽤나 일관적으로 들어맞는 공식들이 몇 가지 있어서 정리해 보았다.
외국(계) 회사에서 조직의 사다리를 오르는 법. 5단계의 뒤로 갈수록 난이도 상승 주의.
1. 성과는 기본이다.
현재 하고 있는 업무의 성과가 부진하면 아무리 잠재력이 큰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승진 대상에서 제외된다. 기본 중의 기본.
2. 조직도에 대한 이해.
특히 대기업의 중간 관리자 이상이라면, 어떤 직업군이 회사에서 어디까지 승진이 가능한지 알고 있어야 한다. 이미 본인이 해당 직군에서 가능한 가장 높은 포지션에 올랐다면, 사다리의 옆으로 이동해서라도 더 높은 자리가 열려있는 직군으로 이동하는 게 현명하다.
정신없이 성장하는 스타트업 / 스케일업 회사라서 조직 구조에 유동성이 크다면 제외.
3. 내가 누구를 알고 있는가.
관심이 있고 승진의 가능성도 있는 포지션을 찾았다면, 그 포지션의 채용을 결정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 채용의 결정권자라면 직속 상사와 그 위의 상사. 채용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라면 해당 부서의 HR, 그리고 직속 상사의 동료들 (협력 부서 포함)이다.
4. 누가 나를 알고 있는가.
앞에서 파악한 채용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영향력 서클),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보자.
(1) 나의 스폰서 - 나의 성장 가능성을 믿고, 내 커리어 성장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며, 조직 내에 나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이 퍼지지 않도록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사람. 꼭 필요하다.
(2) 나를 아는 사람 -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지만, 나의 잠재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수 없거나, 잠재적 경쟁자의 잠재적 스폰서. 틈틈이 피드백을 구하면서 평판을 관리하면 좋다.
(3) 나를 모르는 사람 - 없을수록 좋다.
현재 스폰서가 없거나, 조직개편 등으로 영향력 서클에서 스폰서가 사라졌다면, 승진이나 채용 가능성에 적신호다. 경쟁이 치열한 요직이라면 내가 승리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영향력 서클 내에 나에게 평소 우호적인 사람들과 주기적인 면담을 가지거나 멘토가 되어달라는 제안을 해볼 수 있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빈손으로 나타나 도움을 요청해서는 안된다. 대신 그들의 업무에 도움이 될 만한 주제나 아이디어를 가지고 가서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 나의 성장이 그들의 성공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인상을 남기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나를 모르는 사람의 수가 영향력 서클 내에 과반수 이상이라면, 채용이나 승진 심사에서 내가 조기 탈락할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자리일수록 조직 내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은 잘 뽑지 않는다. (외부 채용 제외)
그들이 참석하는 그룹 회의나 이벤트가 있다면 행사의 진행이나 발표에 자원하는 것이 나의 존재감을 빠르게 알리는데 도움이 된다.
5. 마지막으로,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
앞서 짧은 경력에도 불구라고 유럽 지역 사장자리를 차지한 마리의 예에서 두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안정감이 신뢰도를 높인다. 본인들의 자리를 미리 뺏긴 듯 안절부절못하던 다른 사장들과 대비해서, 마리의 긍정적이고 여유 있는 태도는 마리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둘째, 나 스스로를 미래의 프레임 안에 두면, 내 생각의 폭과 깊이가 달라지고 시야가 넓어진다.
포지션에 지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재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고, 과거에 어떤 성과를 내었는지 광고하기 바쁘다. 이때 본인을 미래 시점에 두고 새로운 업무를 맡은 후의 계획까지 내어 보이는 사람은 아무래도 돋보이기 마련이다.
들여다보면 불가능한 일들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일들을 평소에 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
회사마다 다를 수 있지만, 내가 근무하는 회사의 경우, 중요한 포지션에는 향후 2- 3년간 후임자 계획 succession plan 이 이중 삼중으로 되어 있고, 이를 점검하는 정기적인 회의를 일 년에 2번씩 하면서 눈에 띄는 새로운 후보를 채워 넣고, 성과가 떨어지거나 평판이 떨어지는 후보자를 제외시킨다. 이 모든 결정은 HR의 주관으로 앞에서 언급한 영향력 서클 안에서 이루어진다.
외국계 회사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이나 승진을 염두에 두고 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GOOD L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