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보스 boss들

by 어거스트


싱가포르에서 참석한 커리어 코칭 세미나에서 나이 지긋한 HR (인사부문) 여성 임원이 단상에서 말했다. "여러분, 보스를 사랑하세요. 저는 그 덕분에 정말 많은 보스의 송별회를 근사하게 치러드릴 수 있었답니다." 잠시 갸우뚱하던 사람들은 그 뜻을 이내 알아듣고는 와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직장 생활에서 상사와 합을 잘 맞추면 최소한 그 상사 때문에 회사를 떠날 일은 없다는 말씀. (내 수명이 상사의 수명보다 길어진다)


상사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바뀌었는데, 20여 년의 커리어가 쌓인 지금은 이렇다.

첫째, 일단 좋아하자. 좋아하면 상사의 장점이 잘 보이고, 이런 마음이 무엇보다 나의 정신 건강에 이롭다.

둘째, 최선을 다해서 그/그녀를 빛내주자.




나에게는 최애 보스 3인방이 있다. 20여 년 간 예닐곱명의 직속 상사를 거쳤으니 절반의 성공인 셈인데, 지인들은 이 정도도 흔치 않다고들 한다. 역시 나는 운이 좋은 편인가.


1. JK. 경력 7년 차 즈음에 국내 한 외국계 기업에서 만난 한국인 보스. 간혹 시도하는 괴상한 패션 (이를 테면 선명한 오렌지색 바지에 가죽 재킷. 헤어는 늘 이태원클래스의 박새로미)으로 시각적 즐거움을 주곤 했다. 내 책상이 보스 방문 바로 앞이라서 문을 열고 통화하면 그 내용이 들렸다. 주로 기억나는 건, "우리 마케팅팀 직원들 진짜 끝내준다니까!" 하던 자랑. 대행사 임원들, 본인의 동료와 지인들에게 우리들에 대한 칭찬을 열정을 다해 늘어놓곤 하셨다.

"고 과장은 본인이 뛰어나다는 걸 잘 아는 것 같고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 "고 과장은 남들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서도 한참 파고든 다음에 나한테 제안을 가져오지. 내가 항상 동의해 주는 건 아니지만, 난 고 과장이랑 하는 설득과 방어, 그 대화가 참 재미있어."

이제 겨우 두 살 세 살이 된 세 아이의 육아와 회사일에 치쳐서 늘 눈물 콧물을 달고 살던 나에게 JK는 매일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다. 대기업 임원으로 파리에 계시다가 얼마 전 내 친구가 다니는 회사의 대표가 되신 그분. 친구, 부럽소. 잘 모시게나.


2. 셀리나. 10년 전에 싱가포르 APAC (아시아태평양) 본부에서 보스의 보스로 만난 그녀. 금발에 푸른 눈. 네덜란드인답게 170cm 중반을 넘는 키와 다부진 체격의 여장부 스타일. 그녀는 네덜란드에서 잠시 나의 보스였고, 지금도 24/7 (24시간 주 7일 = 언제든지) 연락을 주고받는 인생 멘토이자 친구, 은인이다.

그녀의 리더십 스타일은 심플하고 일관적이다. "장점만 본다." "일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해준다".

중요한 회의 이후, 또는 연말 평가 자리에서 셀리나는 내가 뭘 근사하게 했고, 그게 자신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했는지 말하기 바빴다. 나의 발전을 위해 부족한 점도 말해달라는 요청에 그녀의 대답. "어차피 완벽한 사람은 없어. 난 네가 계속 성공하기 바라고, 성공은 너의 장점으로 만드는 거야."

셀리나는 회사의 고위 임원에게만 제공되는 본사 지하의 개인 주차 공간을 육아와 일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엄마 아빠 직원들의 비상 착륙지로 제공했고, 나도 종종 혜택을 받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 - 나의 네덜란드 근무 초기에 IT 부서에서 내 핸드폰 국제통화와 데이터 요금이 너무 높다고 경고차원에서 셀리나를 찾아갔다고 한다. (싱가포르-한국-네덜란드 간 각종 서류 교환과 등록 절차 때문에 핸드폰을 붙들고 살았다.) 셀리나가 말하길, "그래? 원숙은 앞으로도 한국/아시아와 연락할 일이 많아. 나랑 동일한 무제한 패키지로 바꿔줘." 그녀는 이와 관련해서 나에게 질문 한번 한 적이 없다. 이런 보스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3. DO. 2년 전부터 지금까지 내가 모시고 있는 보스. 한국계 프렌치 (프랑스인이지만, 부모님이 모두 한국분). 작은 체구, 프렌치 억양이 묻어 있는 영어로 조근조근 말씀하는 스타일인데 어쩐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카리스마를 가졌다. 덕분에 회사 생활을 하면서 "너네 보스 어때? 일하기 힘들지 않아?" 하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얼마 전에도 예전 동료였던 수잔이 커피를 마시자더니 대뜸 DO에 대해서 물었다. "도대체 그런 사람이랑 어떻게 일해?" Yes/No, 0/1의 이분법적 사고에 능한 유럽/서양인들에게 DO와의 대화는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한국인 부모님들의 덕분인지, DO는 시공간을 넘나 드는 사고를 한다. 당장 이달의 영업 이익에 대해 얘기하다가 현재 전 세계의 기술 트렌드와 10년 후 사업부의 비전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자유롭다. 서양인들은 똑똑한 사람(smart)을 좋아하는데 DO는 스마트함을 넘어서는 현자다. 내가 수잔에게 말했다.

"DO랑 일하는 건 간달프 (Gandalf - 반지의 제왕의 현자)랑 일하는 거랑 비슷해. DO는 모든 걸 알고 있고 꿰뚫어 보지. 그래서 DO의 기대에 맞추는 건 불가능해. 내가 이만큼 따라가면 바로 기준을 확 높여버리거든. 그런데 좋은 점도 있어. 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려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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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세 분을 나란히 놓고 보니 공통점이 있다. 자기 사람을 아끼고, 단점보다는 장점을 살려주고, 직원의 역량이 계발될 수 있도록 믿음과 도전을 함께 부여한다는 점. 그리고 세 분 모두 본인의 커리어에서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좋은 보스는 대체 어떻게 만나게 되는 걸까? 모든 게 운발일까?

내 생각에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세 분 모두 생각보다 다이내믹한 평판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최고의 보스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런, 또는 피하거나 도망치고 싶은 보스가 되기도 한다. 셀리나가 말했듯, 어차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선택은 두 가지다.

옵션 1. 보스를 좋아하자. 누구나 장점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장점이 조직 내에서 빛을 발하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자. 효과 - 나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며, 사내에 소나기가 몰아쳐 모두가 홀딱 젖을 때, 나에게는 처마 끝에라도 피할 곳이 내어진다.

옵션 2.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장점을 찾아볼 수 없거나, 단점이 장점을 훌쩍 덮어버리는 보스를 만났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RUN! 도망쳐라. 최선을 다해 최대한 빠르게 멀리 달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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