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후기

HBS Executive Program in Leadership

by 어거스트

올해 1월에 회사에서 결정이 나고, 2월에 어드미션이 통과되고, 3월 말에 수백 페이지의 케이스 스터디가 날아온 후, 마침내 4월, 나는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HBS)에 다녀왔다.


어찌 보면 흔하디 흔한 회사의 리더십 프로그램 중 하나일 뿐이지만, 나는 좀 많이 들떴다.

일 때문에 엄청나게 바쁠 때면 "내가 고등학교 때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진즉 하버드를 갔지"라고 내뱉곤 했는데, 결국 그 일들을 20년 넘게 꾸역꾸역 해냈더니 정말 하버드에 가는구나. 브라보. (학부 아니고 석박사 아니고, 그냥 경영대학원의 단기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디테일은 잠시 접어두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가장 흥미로웠던 두 가지를 기록해두고 싶다.

(1) 그룹이 함께 생활하는 기숙사 - 공.부.만. 하고 싶은 자를 위한 파라다이스

(2) 케이스 스터디 수업 - 엘리트 교육의 신세계




(1) 기숙사 (Esteves Hall in the HBS campus)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내적 환호의 연속이었다. 기숙사를 기대했더니 호텔이 있더라는.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벨맨 분들이 택시에서 짐을 내려 기숙사 방까지 가져다주는데, 내가 움직이는 동선에 몇 초씩 앞서서 모든 문들을 착착착 열어주시니 (전자동 버튼 시스템), 나는 민망한 두 손을 휘저으며 그저 "wow... thank you... so nice..!!"

Chao Center에서 체크인.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제공하는 뷔페식당이 2층이 있다. 맛있었다! (김치랑 불고기도 나옴)
Chao Center 뒷문에서 바로 연결된 기숙사. 나는 찰스강이 보이는 좋은 전망의 방을 받았다.

3층에 올라가 내가 속한 그룹이 생활하게 될 투명한 현관물을 열고 들어가니, 좌측에는 널찍한 부엌과 그 너머로 토론을 위한 회의 공간. 우측에는 안락한 응접실. 정면에는 8개의 침실이 좌 우로 나뉘어 있는 복도가 보였다.

좋은 시설에 감탄할 새도 없이, 공간 디자인의 컨셉이 바로 보였다. 아... 밤낮없이 읽고 토론하고, 그러다 졸리면 에너지 충전하고 (캡슐커피, 드립커피, 캔커피, 콜라, 초콜릿, 에너지 바들이 종류별로 찬장과 냉장고, 테이블에 꽉꽉), 잠깐 자고 나와서 다시 읽고 토론하고...


오리엔테이션 때 방이 너무 작아서 그 안에서 오래 있고 싶지 않을 거라는 경고가 있었는데, 웬걸, 방콕을 좋아하는 나에겐 딱이었다. 창문 너머로 찰스강 건너로 이어지는 하버드 캠퍼스, 강변의 러너들, 학생들의 조정 연습을 볼 수 있는 행운에도 감사했다.


책상과 주변은 각종 프린트물과 당 충전용 쵸콜렛들, 그리고 다양한 기념품들로 너저분.. (HBS 가방, 우산, 몰스킨 노트, 교수님들의 책들이 무료! 가 아니고 수업료에 포함)


공간 디자인과 함께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건 방의 조명 시스템이었다.

침대 헤드의 간접 조명이 모션 센서로 온/오프 되는데, 너무 좋았다. 새벽까지 케이스를 읽다가 스르르 잠들면 불이 꺼지고 (꿀잠 가능), 화들짝 놀라 움찔하면 바로 불이 켜져서 손에 쥐고 잠들었던 페이퍼를 바로 다시 읽을 수 있는 엄청난 시스템. 의도한 바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담당자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면 방은 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부엌은 각종 서바이벌 음료와 스낵으로 다시 채워져 있었다. 드라이클리닝을 포함, 책상 위의 내선 전화 한 통이면 모든 문제 해결. 정말 공부와 프로그램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해준 배려가 느껴졌다.


하루의 주어진 시간을 일과 가정, 내가 해결해야만 하는 자잘한 일들로 쪼개고 쪼개서 살다가 이렇게 잠시 살아보니 얼마나 좋던지!!! 밤늦게 불을 켜고 책을 읽어도 잔소리하는 사람 없고, 끼니때가 되면 하던 일 다 접어두고 주방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니. 꿈만 같았다. (여보, 얘들아, 미안 ㅎ)




(2) 케이스 스터디 수업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이 케이스 스터디 위주로 수업한다는 말을 듣고 몇 개의 유튜브 영상을 미리 봐두긴 했지만, 실전이 주는 느낌은 매우 달랐다. 말 경주를 영상으로 보는 것과, 말에 직접 타고 달리는 것의 기분 차이랄까.


일단 강의 첫날인 일요일 오후, 3시 기숙사 체크인 마감 후에 바로 4시에 첫 강의가 시작됐다.

유튜브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로만 알던 Linda Hill 교수님이 등장하시더니 (두근두근!), 자기소개나 강의 소개 따윈 제치고 바로 질문 시작. "자, 여러분이 이 마스터카드 케이스의 주인공 (CEO)라면 주어진 옵션 4가지 중에 어떤 선택을 할 건가?" Linda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래스의 반 이상이 손을 들었다.

한 케이스를 다루는 90분 동안 교수의 말은 15분이 될까 말까. 수업의 퀼리티는 학생들의 질문과 토론, 그리고 능수능란한 교수의 진행 능력으로 좌우됐다.

실제 비즈니스 의사 결정에 정답이란 없듯이 (또는 오직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듯이), 정답을 찾는 기술이 아니라, 상황 분석 능력과 의사 결정 능력을 훈련시키는 수업 방식이 신선하고 긴장되고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초상권 보호를 위한 blur effect. 강의 중엔 촬영 금지라서, 쉬는 시간에 겨우 건진 사진이다. 지정석은 3일마다 교체.

또 다른 재미는 예상치 않은 스타 강사/ 패널들의 출연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명성은 1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교실 안의 분위기.

한 회사의 케이스를 70분 정도 땀나게 토론하고 나면, 그 회사의 CEO나 케이스의 주인공들이 화상 연결되거나, 강의실에 직접 나타났다. 궁금한 내용을 교수가 아닌 당사자에게 직접 질문하고 답을 들을 수 있는 기회.


케이스 중에 다국적 제약회사 화이자 Pfizer 사례가 있었다. 수년이 걸리는 백신 임상 프로세스를 2개월로 단축시켜 COVID로부터 인류를 구한 스토리이고, 사례의 주인공이 강의실에 앉아있었다 (C-level 중역). 다들 그가 과감하게 행한 조직 혁신과 리더십에 대해 분석하고 코멘트하는 중에 독일에서 온 버트(Bert, 가명)가 손을 들더니 이런다. "조직의 문화를 바꾸기 위해 사용된 수년의 기간, 그리고 백신 임상 프로세스의 2개월은 인상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내가 보기엔 너무 느리다. 사례가 과대평가된 것 같다."

와우.. 동방예의지국 출신의 나로서는 내 일도 아닌데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하여간 매 수업의 90분이 지루했던 적이 없다!




그리고 소소한 노트...


1. 오랜만에 계단식 강의실에 앉으니, 27년 전 첫 번째 대학교 수업이 생각나서 마음이 웅장해졌다. 나는 역시 학교가 좋다는 결론.


2. 평소 존경하던 애드 캣멀 (Ed Catmull, co-founder of Pixar studio)과 화상 연결로 대화를 나눈 걸 잊을 수가 없다. 스티브 잡스의 불같은 성질머리를 견딘 그의 노하우는 "다음에 얘기해. let me come back to you" 하고 나서 본인이 준비되기 전까지는 절대 다시 그 토픽을 꺼내지 않았다는 말에 다들 빵 터지고.


3. 내가 참여한 프로그램의 전체 참석자는 60명, 평균 커리어 기간은 22년, 다양한 분야의 중역 또는 CEO. 이 중 여성 비율은 고작 30%. 업계 여성 임원들의 비율보다는 훨씬 높은 숫자라고는 해도 아쉬웠다, 여성들의 더 많은 참여를 볼 수 있기를.


4. 다들 나처럼 회사의 지원으로 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최소 반 정도는 개인이 투자해서 오는 듯했다. 대체 그런 돈을 어떻게 개인이 마련하냐는 나의 순진한 질문에, 멕시코에서 온 페르난도 (Fernando, 가명)가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나에게 하지 않는 투자를 대체 누가 해줄까요? if not you, who else is gonna invest in you?"


5. 아침 6시부터 저녁 8시까지 매일매일 숨 돌릴 틈 없는 일정이었지만, 우린 (그들은) 어떻게든 짬을 내어 놀았다. 생전 처음으로 NBA play-off를 관람하기도. Let's go, Celtics!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는데, 엄청난 규모의 경기장이 눈 앞에 딱! 농구대의 KIA 로고. 저만 흐뭇한가요?



결론.

짧았던 HBS의 경험은 LinkedIn에 근사한 엠블럼 하나를 추가하는 것 이상의 훨씬 큰 가치를 주었다.

다시 기회가 된다면 기쁘게, 기회가 되지 않는다면 만들어서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 HBS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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