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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Mar 07. 2019

콩트로 떠나는 유럽여행

여섯 번째 여행- 노르웨이


  세상 공평한 기라~ 2


 <1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아뇨. 제 남편은 서울에서 쭉 학교에 다녔어요. 서울 사람이거든요.”   


  다행히 아내가 끼어들었다. 평소보다 차분한 말투로, 교양 넘치는 사모님 특유의 미소까지 지었다. 복수혈전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아내는 북유럽 패키지여행팀을 소개받던 순간부터, 더 정확하게는 김창석이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그의 아내에게 명품가방을 사주던 순간부터, 그들 부부에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같은 돈을 내고 패키지여행을 왔지만, 그들은 우리와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여행하는 도시마다, 자유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명품숍을 찾아다니며 쇼핑을 해대는 그들은 10개월 카드 할부로 여행비를 결제한 우리와 다른 종족이었다. 자존심이 센 아내는 그들을 졸부라고 깎아내리면서도 쁘띠 성형 덕에 또래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그의 아내를 부러워했다. 그런 아내 앞에서 김창석이 학교를 언급했으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물린 셈이었다. 

  아내는 조곤조곤 우아한 말투로 우리가 서울 사람임을, 서울의 일류대학을 나온 인텔리라는 것을 어필했다. 그들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 틀림없었다. 검은 빵에 버터를 바르던 김창석의 손에 스르륵 힘이 빠졌다. 커피에 설탕을 넣던 그의 아내 표정도 새침해졌다.  



  “오늘은 드디어 피오르 유람선을 타는 날입니다. 기대 많이들 하고 계시죠? 오늘 일정을 알려드릴게요. 먼저 체크아웃을 한 다음, 오스테달 빙하의 한 자락인 빙하 박물관을 둘러보고, 호난달에서 점심을 먹고, 헬레쉴트로 이동해서 노르웨이 관광의 하이라이트 피오르 유람선을 타겠습니다. 그리고 달스니바 전망대에 오른 다음 호텔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인솔자를 따라 빙하 박물관을 관람하고, 피오르 유람선을 타면서도 내내 찜찜했다. 일단 위기는 모면했지만, 자꾸 김창석이 걸렸다. 삐딱해 보이는 그의 시선이 계속 나를 주시하는 느낌이었다. 내색은 못 했지만 거북했다. ‘죄짓고는 발 뻗고 못 잔다.’는 말이 실감 났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필 북유럽 여행에서 맞닥뜨리다니. 아내 등쌀에 못 이겨 큰 맘먹고 떠나온 여행인데, 김창석 때문에 망쳐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속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그는 보란 듯 호기를 부렸다. 피오르 유람선에서 여행팀 전원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더니,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는 테이블마다 와인을 돌렸다. 왠지 나를 의식한 행동 같았다. 전교 1등이었던 내게, 그에게 도둑 누명을 씌웠던 내게, 지금은 은퇴 후의 삶조차 막막한 월급쟁이가 되어버린 내게, 그의 부를 과시하며 복수라도 하는 것 같았다. 속이 쓰렸지만 참았다. 그나마 내 정체를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저녁 식사 후, 방으로 올라오자마자 침대로 쓰러졌다. 유난히 긴 하루였다. 아, 그런데 창밖이 여전히 환했다. 해가 지지 않는 북유럽의 백야가 나를 유혹했다. 잠시 쉬었으면 어서 밖으로 나와 황홀한 노르웨이의 백야를 즐기라고 손짓했다.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진 아내를 뒤로하고, 나는 호텔 주변 산책에 나섰다. 산속에 오롯이 자리 잡은 호텔 주위는 온통 블루베리 나무 천지였다. 자연스러운 호텔 조경은 주위 풍경과 잘 어울렸다. 이런 곳에서 한 달만 머문다면, 내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스트레스를 모두 날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도 달콤했다. 짧은 산책길에 영혼까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마주치는 짙은 초록빛에 가슴이 시원해져 슬그머니 미소를 지을 때였다. 구부러진 숲길 너머에서 바스락거리는 인기척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가, 핵교 댕길 때 억수로 공부 잘했으면 뭐 하노?” 


  카랑카랑한 김창석의 목소리가 산책로에 울려 퍼지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마저 엄습했다. 그와 마주치면 어쩐지 낭패를 볼 것 같아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숨소리까지 죽이며, 산책 중인 김창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지가 또, 일류대학 나왔으면 또 뭐 하노? 지 마누라 빽 한 개 못 사주는 게, 그기 남자가?”

  “맞다. 내는 일류대학 나온 냄편보다 명품빽 사주는 자기가 더 좋다~”  

  “그라제? 그니까, 세상은 공평한 기라. 크하하하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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