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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Mar 11. 2019

콩트로 떠나는 유럽여행

일곱 번째 여행- 프랑스/ 보르도, 생테밀리옹

      와인 향기를 찾아서 1     

    

  “여행이 좋아서죠. 안 그러면 힘들어서 여행 피디 못합니다.”


  보르도 촬영을 마치고 인근 와인마을 생떼밀리옹으로 향할 때였다. 프랑스 현지 코디가 잔뜩 궁금한 얼굴로 인호에게 왜 여행 프로그램 피디를 하느냐고 물었다. 참 당연한 걸 묻는다. 미치도록 좋으니까 하지.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잔뜩 미소를 지으며, 그가 왜 피곤함을 무릅쓰고 여행 피디를 고집하는지 이야기했다. 

  솔직히 여행 프로그램에 배정받기가 공중파 방송국 피디로 입사하기보다 어려웠다. 특히 그처럼 경력이 짧은 피디에게는. 어쨌든 인호가 오매불망 원하던 프로그램에 발령을 받고 일한 지 1년이 지났다. 흔히 취미가 일이 되면, 취미마저 싫어진다고들 하지만, 그는 아직 일이 되어버린 취미가 좋다. 여행을 방송으로 옮기는 일이 막 사귀기 시작한 애인처럼 사랑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인호는 오늘도 열심히 카메라를 메고 세계를 누비는 중이다.



  “생떼밀리옹 처음이시죠?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예쁜 마을입니다. 기대하세요.”


  현지 코디의 말은 뻥이 아니었다. 보르도를 떠나, 끝없이 이어진 포도밭을 달려 도착한 생떼밀리옹은 동화책을 막 찢고 나온 마을 같았다. 눈부시도록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적당히 품위 있게 낡은 돌집들이 아기자기 들어선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골목길마다 와인 갤러리들이 늘어서 있고, 광장에는 야외 카페에서 점심을 먹으며 가을 햇살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그는 마을을 설렁설렁 돌아보며 여행자의 눈으로 촬영을 했다.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하루쯤 이런 곳에서 일이고 뭐고 다 접어두고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마을 촬영이 끝나자 현지 코디가 그를 와인 상점으로 데려갔다. 지하에 거대한 동굴 와인 저장소가 있는 와인 상점은 그 자체가 완벽한 와인박물관 같았다. 와인 시음도 특별했다. K-pop을 좋아한다는 매니저는 아주 귀한 와인을 꺼내왔다. 한 병에 7, 8백 유로를 훌쩍 넘는 것들이라 가격을 밝힐 수 없었지만 인호는 방송 덕에 호사를 누렸다. 이 맛에 카메라를 메고 여행을 다니는 건가? 어쨌든 방송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맛볼 수 없는 와인을 시음하고 나니 그는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최고급 와인을 시음한 여운을 만끽할 여유도 없이 현지 가이드는 그를 또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더 멋진 곳으로. 



   “와이너리 촬영은 더 특별할 겁니다.”


  현지 코디가 샤또 K로 들어서며 어깨를 으쓱였다. 쌩떼밀리옹에서도 손꼽히는 와이너리를 섭외한 것을 자랑하고 싶은 눈치였다. 

  샤또 K는 한 눈에도 쌩떼밀리옹 그랑 크뤼의 위엄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포도밭 한가운데 오롯이 앉아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은 중세시대 영주가 살았던 성처럼 거대했다. 샤또 내부는 현대식으로 리모델링되어 있었다. 7성급 호텔 스위트룸처럼 세련되면서도 아늑해 보이는 느낌이 특이했다. 

  인호는 매니저의 안내를 받으며 샤또 내부를 촬영했다. 와인 테스팅을 하는 공간을 지나자 연도별로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와인들을 전시해 놓은 작은 뮤지엄이 나타났다. 럭셔리한 가구와 골동품들로 장식된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띈 건, 화려한 금속 액자에 걸린 초상화였다. 샤또 K의 초대 설립자부터 현재 소유주까지, 하나같이 알랭 드롱 친척들인가 싶을 정도로 잘 생긴 얼굴들이 걸려있었다. 부자가 잘 생기기까지 하다니, 세상 참 불공평하다, 고 인호는 속으로 투덜투덜하며 샤또 내부 촬영을 마쳤다.


  “우리도 TV에 나오는 건가요? 어느 나라 방송이죠?”


  너른 포도밭으로 나와 열심히 포도를 따는 인부들을 촬영할 때였다. 통통한 손으로 포도를 따던 멜빵바지 남자가 짧은 영어로 물었다. 현지 코디가 얼른 나서서 한국 방송국에서 온 여행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하자, 남자의 표정이 상큼한 샐러드를 먹은 것처럼 밝아졌다.


  “어? 여기도 한국사람 있는데. 저어기 보이는 저 여자요.”



  멜빵바지 남자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낡고 허름한 작업복에 모자를 푹 눌러쓴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여자가 보였다. 


  “어, 한국 사람 맞네요. 햇빛 가린다고 모자 쓰고 스카프까지 둥둥 둘렀잖아요.”


  현지 코디가 짓궂게 한마디 했다. 관광지에서 챙이 넓은 모자에 양산까지 들고 있는 동양 여자들은 거의가 한국 사람들이라며 호들갑까지 떨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한국 방송국에서 나왔습니다.”


  현지 코디가 목에 힘을 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소중한 아기를 다루듯 조심조심 포도를 따던 그녀가 갑작스러운 한국말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포도밭 사이로 휘리릭 한줄기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목을 감싸고 있던 스카프가 바람에 파르르 휘날렸다. 어? 저, 저 여자는…… 

  <2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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