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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Mar 12. 2019

콩트로 떠나는 유럽여행

일곱 번째 여행- 프랑스/ 보르도, 생테밀리옹

와인 향기를 찾아서 2


<와인 향기를 찾아서 1편에서 계속>


  그녀였다. 찰나의 순간, 번개를 맞은 듯 인호의 머릿속에 그녀의 기억이 또렷이 떠올랐다. 대학 새내기 시절, 3학년 선배 그녀는 인호와 친구들의 여신이었다. 

  트레이드마크처럼 하늘하늘한 스카프를 목에 감고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교정을 걸을 때마다 애타는 가슴을 쥐고 쓰러지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인호와 친구들은 긴 생머리에 사슴보다 맑고 투명한 눈, 백설 공주처럼 희고 아름다운 피부에 꽃잎 같은 입술, 게다가 쭉쭉빵빵한 몸매까지 완벽하게 갖춘 그녀를 보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3학년 강의실을 기웃거렸다. 

  미모에 실력까지 갖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매일매일 새로운 뉴스였다. 그녀가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봤는지, 그녀가 먹은 점심 메뉴가 무엇이었는지, 그녀가 어떤 커피를 마셨는지, 오늘은 어떤 녀석이 그녀에게 집적거리다 거절을 당했는지, 등등 유치하고 소소한 모든 일들을 떠들고 확인하며 인호와 친구들은 여신의 존재에 일희일비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상태로 교정을 걷던 인호는 바람에 무언가 날아와 발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했지만, 별생각 없이 그것을 밟았다. 신발과 엉킨 그것이 그를 따라 발밑을 뒹굴었다. 세 걸음쯤 걸었을까, 그의 코앞에 사색이 된 여신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는 본능적으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 같았던 실크 스카프가 흙투성이가 된 채 그의 발밑에 깔려 있었다. 으아, 감히 여신의 스카프를 밟다니…… 놀란 토끼눈이 돼서 그녀와 스카프를 번갈아 보는 순간 퍽, 누군가의 주먹이 그의 얼굴로 날아왔다. 


  “야, 새꺄. 감히 여신님의 스카프를 밟아?”


  그는 그날 처음으로 남자의 우정이 새털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전까지 형제처럼 살갑던 녀석들이 어떻게든 여신한테 잘 보이려는 속셈으로 정의의 기사라도 된 듯 그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인호야, 괜찮니?”


  친구들의 폭력에서 그를 구해준 것은 그녀였다. 아, 게다가 그의 이름까지 불러주었다. 잔뜩 걱정 어린 눈으로, 가슴이 터질 듯 감동한 그는 그러나 감히 여신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우물쭈물 주저주저하는데 흙투성이가 된 스카프가 눈에 들어왔다.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다. 뒷감당을 할 자신도 없었다. 어서 이 자리를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냅다 흙투성이 스카프를 움켜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저, 그 자리를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부터 여신이 보이지 않았다. 은근한 눈빛으로 여신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그는 여신이 프랑스로 유학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상실감에 빠진 친구 놈들은 그가 여신의 스카프를 밟고 뭉개는 바람에 상심한 여신이 영영 사라진 거라고,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대며 그에게 주먹을 날렸었다.      



  10년 세월이 지났어도 여신의 자태는 여전했다. 낡은 작업복 따위로 여신의 품격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아, 그런데 어쩌다 프랑스로 유학 갔다는 여신의 처지가 일개 노동자로 전락한 것일까. 인호의 가슴이 찌르르 아파왔다. 


  “혹시, 저 기억하세요?”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그녀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남루한 자신의 처지를 들키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모른 척할 걸 그랬나? 그의 황량한 가슴으로 울컥 쓰나미 같은 후회가 밀려오던 순간, 바람 빠진 프랑스식 영어가 들렸다. 


  “죄송합니다만, 제 아내와 인터뷰하실 건가요?”


  잘 생긴 남자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뭐야 이 남자는… 어, 그런데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누구지? 누구였더라? 당황하는 인호에게 그가 악수를 청하며 와인 향이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샤또 K 대표 미셸입니다.”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심술이 잔뜩 묻은 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에 그녀의 남루한 작업복이 펄럭이고 하늘하늘한 스카프가 살사댄서처럼 춤을 추었다. 옛날 그녀의 스카프가 그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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