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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Mar 18. 2019

콩트로 떠나는 유럽여행

여덟 번째 여행- 오스트리아 / 인스브루크

    짠내 허니문 1

     

  새소리에 잠을 깬 기주가 부스스 눈을 떴다. 

  "잘 잤어?"

  어느새 면도까지 마친, 유준이 그녀를 부드럽게 안았다. 나지막이 속삭이는 그의 아침 인사가 말랑말랑 달콤하다. 아, 행복하다. 기주는 깎아놓은 밤톨처럼 잘생긴 남편을 바라보며, 이 남자랑 결혼하기 참 잘했다고, 그래서 정말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유준이 “라면 물 끓일까?”라고 묻기 전까지는.       



  기주와 유준은 6년간의 긴긴 연애 끝에 결혼했다. 첫 만남부터 불꽃이 튀었고, 사랑이 너무 뜨겁게 타올라 모든 것을 태워버릴 뻔한 위기도 있었다. 연애가 길었던 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가난한 연인이었기에, 그들의 연애는 늘 힘들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서로의 처지를 측은해했고, 가끔은 지겨워도 했었다. 사는 일이 힘들어서 결혼은 사치라고 외치며 이별을 고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헤어질 위기를 수없이 겪으면서도 그들이 마침내 결혼하기까지는 ‘유럽여행 적금’의 힘이 컸다. 

  대학 시절부터, 그들의 로망은 유럽여행이었다. 여행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유럽’이라는 단어가 주는 막연한 설렘이 좋았다. 그래서 친구들처럼 배낭에 의지해, 훌쩍 유럽으로 떠나고 싶었으나, 팍팍한 현실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유럽으로 가는 현실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늘 그렇듯 돈 때문이었다. 독하게 마음먹고 여행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전전했지만 돈이 모이지 않았다. 어쩌다 돈이 좀 모일까 싶으면 누군가 낚아채듯 빠져나갔다. 희망도 함께 사라져 갔다. 


  “우리 이번 달부터 적금 붓자. 각자 6만 원씩, 12만 원. 5년 만기로, 어때?”


  유준이 그동안 모은 돈을 아버지 병원비로 헌납하고, 쓰디쓴 소주를 들이켜고 있을 때, 기주가 ‘그들만의 유럽여행 적금’을 제안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중도해약 없이 적금을 붓고 적금이 만기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둘이서 유럽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바로 은행으로 달려가 적금을 들었다. 굳세게 서로의 손을 잡고 약속도 했다. 적금이 끝나는 대로 결혼하고,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가자고.  



  ‘유럽여행 적금’의 위력은 대단했다. 시들어가던 그들의 사랑이 나날이 늘어가는 적금 액수와 함께 살아났고, 삶의 희망도 생겼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사랑의 권태기도 적금의 힘으로 이겨냈다. 우리가 정말 결혼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적금통장을 바라보며 털어냈다.      

  적금 만기와 함께 그들은 결혼식을 기획했다. 유럽여행자금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들은 결혼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 신혼집은 기주가 살던 오피스텔로 대처했고, 양가 합의로 예단이나 혼수는 생략했다. 예물은 물론이고 결혼반지도 없었다. 결혼식도 유준네 시골집 마당에서 ‘작은 결혼식’을 했다. 부조금을 내고 초대받지 못한 친척과 친구들에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기주와 유준은 ‘짠내’ 나는 결혼식을 거쳐 대망의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아침부터 꼭 라면을 먹어야 해?”


  기주는 와락 치솟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으며 유준을 흘겨봤다. 아무리 여행비를 아끼기 위해서라지만, 일주일째 아침마다 컵라면을 먹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기주는 갓 구운 빵에 고소한 버터와 달콤한 잼을 발라 커피와 함께 먹고 싶었다. 스크램블드에그와 햄, 치즈와 샐러드가 있는 호텔 조식은 바라지도 않았다. 아침마다 의무처럼 먹어야 하는 컵라면만큼은 그만 먹고 싶었다. 



  유준이 컵라면을 고집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느끼한 유럽 음식으로 점심과 저녁을 먹으려면, 아침만큼은 속을 풀어줄 수 있는 라면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호텔 조식 비용을 아끼겠다는 짠돌이 근성 때문이었다. 문제는 비용 절감이 온종일 계속되는 데 있었다. 여행 시간을 절약한다는 핑계로 점심은 무조건 샌드위치였다. 그는 레스토랑에 2시간이나 붙잡혀 있을 시간에 샌드위치를 들고 여기저기 볼거리를 찾아다니기를 고집했다. 그렇다고 저녁에 좋은 레스토랑엘 가는 것도 아니었다. 비싼 유럽 물가를 탓하며 값싼 피자리아 식당이나 터키 식당을 고수했다. 


  먹을 것뿐 아니라 잠자리도 구질구질했다. 파리에서는 지하철 종점에 내려서 30분이나 걸어야 하는 낡은 호텔을 예약해 놓더니, 스위스 루체른과 취리히에서는 유스호스텔을, 이탈리아 로마와 베네치아에서는 한인 민박집을,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기차역 앞의 허름한 호텔을 숙소로 잡았다.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바빠진 일을 처리하느라, 여행 준비를 유준에게 맡긴 것이 실수였다.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아무리 경비가 빠듯해도 그렇지, 이건 아니었다. 기주는 유준이 예약한 숙소로 들어설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지만 참았다. 오랜 시간 기다리고 공들인 유럽여행을 망칠 수 없어서였다. 다행히, 잘츠부르크와 인스브루크의 호텔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아기자기한 티롤 풍의 인스브루크 호텔은 그녀의 감성을 자극했다. 그런데 이렇게 예쁜 호텔에서 아침부터 라면이라니… 

기주는 괜히 심술이 나서 입을 삐죽이며, 남편이 애정 하는 라면을 거부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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