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여행-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1편에서 계속>
“나, 오늘 아침은 커피 한 잔만 마실래.”
“어, 배고플 텐데… 그럼, 점심은 레스토랑에서 먹자. 티롤 음식 맛있대.”
정말?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자는 말 한마디에 기주의 마음이 스르륵 풀렸다. 기분까지 좋아져서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단순하기는 참. 유준은 허허 웃으며 기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인스브루크에서 하루가 시작됐다. 맛있는 점심을 먹을 생각에 기주의 마음이 급했다. 서둘러 준비를 마친 그들은 왕궁 교회를 둘러보고, 인스브루크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시계탑에 올랐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 아래 황금 지붕을 비롯한 구시가지 건물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구시가지를 빠져나온 그들은 하펠레칼 슈피츠로 가는 등산 열차를 탔다. 2334미터 하펠레칼 슈피츠까지 가려면 등산 열차에서 내린 뒤, 케이블카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정상으로 향하는 케이블카 안에서 발아래로 펼쳐지는 인스브루크 시내를 바라보며, 기주는 유준의 손을 꼭 잡았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이 풍경을 유준과 함께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떨리게 행복했다.
드디어 하펠레칼 슈피츠에 도착했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난 감동의 물결에 몸을 맡기며 기주는 유준과 결혼하기 잘했다고, 유럽으로 신혼여행 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른한 행복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다시, 구시가지로 돌아오자 작은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황금 지붕 앞 광장에서 티롤 지방 민속음식축제가 한창이었다. 처음 보는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수두룩했다.
“와, 맛있겠는데?”
입맛을 다시던 유준이 갑자기 꼬치구이와 슈니첼을 샀다. 얼마나 동작이 빨랐던지, 말릴 틈도 없었다. 그와 동시에 햇살이 쏟아지는 야외 테라스에서 점심을 즐기려던 기주의 꿈이 산산조각 났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했던 구질구질한 유럽여행의 기억들도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몸 안에서 무언가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꾹꾹 눌러 참았던 설움이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고, 기주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그래서였다. 기주는 유준이 들고 온 음식들을 냅다 던져버리며 소리쳤다.
“그만하자. 구질구질한 여행, 너나 해!”
울컥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며 기주는 광장을 빠져나갔다. 어? 왜 그래? 야, 기주야. 어디가? 당황한 유준의 목소리가 그녀를 따라왔다. 다급하게 유준이 그녀를 잡았다. 이거 놔! 기주는 유준을 뿌리치며 빠른 걸음으로 구시가지를 벗어났다. 아무래도 이 결혼,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이건 가난에서 비롯된 문제만이 아니었다. 오래된 습관으로부터 쌓이고 쌓인 생각의 차이, 어쩌면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문제일지 몰랐다. 아, 어쩌자고 저런 짠돌이랑 결혼했을까. 그녀는 자신이 한심했다. 물밀 듯 후회도 밀려왔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투두둑 흘렀다.
“기주야, 그러지 마.”
유준이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버럭, 화를 내며 다시 그를 뿌리치려던 기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의 손에 뭔가가 만져졌다. 작고 동그란 것. 반지였다.
“미안해. 여행비를 아껴서라도, 결혼반지는 꼭 해주고 싶었어.”
“으아앙. 이 바보야. 내가 원하는 건 반지가 아니란 말이야.”
그녀를 바라보는 유준의 눈빛이 너무 애틋했다. 그 따뜻한 시선에 기주의 몸이 휘청했다. 솟구치듯 눈물이 흘렀다. 기주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그녀의 가난한 동지, 유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유준이 미웠다. 아니, 그의 지질한 모습 속에 보이는 그녀의 일부가 죽도록 미웠다. 유럽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그들의 가난이 징글징글하게 미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