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여행- 프랑스/ 르와르 고성 지대
으아, 난 왜 이렇게 지지리도 운이 없을까. 큰 맘먹고 2박 3일 고성 투어에 합류했는데, 멤버들 매너가 완전 꽝이다. 모처럼 우리말을 듣고, 우리말로 수다를 떨고 싶어서 우리나라 여행사 프로그램을 선택했건만, 사람들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내게 눈길 한 번 안 준다. 내 인상이 별론가? 아님 혼자 왔다고 왕따 시키나? 자기들끼리만 웃고 떠들면서 나한테는 말 한마디 안 건네니, 은근히 서러워진다.
뺀질이처럼 생긴 가이드도 나만 무시하는 것 같다. 내 옆에 앉은 여자는 더 심하다. 버스가 파리를 떠날 때부터 이어폰으로 음악만 들으며, 나랑은 시선도 안 맞춘다. 칫! 자기도 혼자 왔으면서, 나랑 인사라도 나누면 어디 덧나나? 멀리 프랑스까지 와서, 수많은 여행 프로그램 중에 ‘르와르 고성 투어’를 선택한 것도 인연인데, 같은 동포끼리 아는 척 좀 하면 큰일이라도 나나? 에잇.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프랑스 여행사에서 하는 고성 투어를 신청할 걸 그랬다.
“새벽부터 달려오느라 많이들 힘드셨죠? 이제 곧, 샹보르 성에 도착합니다.”
뺀질이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더니 방송을 시작한다. 흠, 드디어 갑갑한 버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더는 소외감에 시달리며, 창밖을 바라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르와르는 기후가 온화하고 숲이 울창해서 프랑스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곳인데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프랑스 왕과 영주들은 이곳에 거대한 성을 세웠습니다. 왜냐고요? 이곳은 숲이 울창해서 사냥감이 풍부하고, 드넓은 르와르 평야에서 최고의 와인이 생산됐기 때문이죠. 자~ 여러분, 모두 창밖을 보세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투어 멤버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 멀리 아련하게 그림 같은 샹보르 성이 보인다. 길에는 붉은 단풍 낙엽 카펫이 깔려있고, 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나무들이 씩씩한 병정처럼 도열해있다. 고혹적인 성의 자태에 사르르 가슴이 떨린다. 지난 3년 간, 학교와 기숙사만 오가며 파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설움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다. 아, 그깟 공부가 뭐라고, 이 좋은 걸 못 보고 살았다니…
“자, 지금부터 2박 3일 고성 투어 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곳에 있는 고성 13개를 다 구경하려면 일정을 서둘러야 합니다. 우선 오전에 샹보르 성을 둘러보고, 앙부아즈 성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신 뒤, 오후에는 앙부아즈 성과 쉬농소 성을 관람하겠습니다.”
뺀질이 가이드를 따라 샹보르 성으로 들어갔다. 아니, 이게 뭐지? 웅장하고 화려한 성의 자태에 흠뻑 빠져들었던 나는 텅 빈 성안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해졌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나 보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샹보르 성 내부가 썰렁해서 놀라셨죠? 프랑스 혁명기에 가구와 세간을 약탈당해서 그렇습니다. 이 성은 프랑수아 1세가 착공해서 우여곡절 끝에 루이 14세가 완공한 성으로 중세와 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의 내부 길이는 117미터고, 440개에 달하는 방과 365개의 화려한 굴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성인데요. 1840년에 프랑스 역사기념물로, 198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어미를 쫓아가는 새끼 오리들처럼 졸졸졸 가이드를 따라가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을 때였다. 화려한 드레스에 깃털 모자를 쓴 여자가 우리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왔다. 스크린을 막 탈출한 공작부인 같은 자태. 더 구체적으로 프랑스 영화, <몰리에르>에 나왔던 엘미르 부인처럼 엘레강스한 여자가 일행들을 제치고 내게 다가왔다. 뭐지? 갑작스레 주목을 받으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이 여자 정체가 뭘까?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