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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Apr 01. 2019

콩트로 떠나는 유럽여행

열 번째 여행- 덴마크 코펜하겐

  첫사랑 도둑 1


  한나의 집을 나와 인어공주 동상으로 가는 버스를 탔어. 괜히 코펜하겐에 왔다고 후회하면서 말이야. 발걸음이 완전 천근만근이었지. 

  너도 알지? 내가 원래 ‘소탐대실’ 하잖아. 작은 것에 욕심부리다 큰 것을 놓칠 때가 많았지. 지금도 그런 것 같아.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진실을 발견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나는 지금 버스에서 내렸고, 세상살이의 전의를 상실한 사람처럼 터덜터덜 인어공주 동상을 향해 가고 있어.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것처럼, 내 덴마크 여행이 종말을 향해 가더라도 오늘은 코펜하겐 구경을 해야 하니까.   



  사실, 코펜하겐 여행은 충동구매처럼 시작됐어. 너도 알지? 내 룸메이트 데보라. 대책 없이 오지랖 넓고, 푼수끼가 다분하지만 마음은 비단결인 스페인 친구 말이야. 데보라가 초대를 받았다며 코펜하겐에 함께 놀러 가자고 나를 부추겼지 뭐야. 혼자 가기 심심했던 거지. 부활절 방학에 딱히 갈 데가 없었던 나는 물가 비싼 덴마크에서 ‘숙박비’를 해결할 수 있다는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데보라를 따라나섰어. 그렇게 지옥의 문으로 들어선 거지.   

  데보라를 초대한 친구 한나는 전형적인 북유럽 데니쉬 여자였어. 커다란 덩치에 짧은 커트 스타일이 살짝 보이쉬한 느낌이었어. 스페인어를 전공했고, 마드리드에서 공부할 때 데보라의 도움을 많이 받았나 봐. 오지라퍼 데보라가 얼마나 알뜰살뜰 한나를 보살폈을지 상상이 가더라.  

  그런데 말이야, 데보라를 따라 한나의 집으로 들어서는데, 오소소 소름이 돋듯 한기가 들었어. 집이 추웠냐고? 아니, 한나가 온몸으로 내뿜은 냉랭한 적대감 때문이었어. 데보라는 전혀 몰랐겠지만, 나는 단번에 느낄 수 있었지. 당황했지. 왜 초면인 나를 저렇게 못마땅한 눈으로 볼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곰곰이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더라. 그런데 왜? 내 인상이 별로였나? 아니면 호, 혹시 한나가 인종차별주의자? 유색인종에게 적대감을 느끼는 인간인가, 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 



  한나는 교묘하게 나를 홀대했어. 분명히 데보라가 친구를 데려가겠다고 말했을 텐데, 나를 완전 불청객 취급하더라. 데보라에겐 포근한 이불을 주면서 내겐 거칠거칠한 담요 한 장만 주었고, 내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마자 욕실 청소를 대대적으로 하는 거야. 은근 기분 나쁘게 말이야. 함께 커피를 마실 때도 그랬어. 내가 분명히 에스프레소를 마시겠다고 했는데, 내 커피에 우유를 잔뜩 넣어주더라고. 

  티볼리 공원에 놀러 갔을 때도 그랬어. 한나는 공원을 돌아다니면서도 계속 데보라와 마드리드에서의 추억만 이야기했어. 공감대가 없는 나는 절대로 낄 수 없는 대화였지. 노골적으로 스페인어로 말하기도 했어. 오랜만에 모국어를 써서 그럴까? 데보라도 신나서 스페인어로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더라. 나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거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도 내내 불편했어. 초대해준 답례로 내가 저녁을 사겠다고 하자, 각자 계산하자며 단칼에 내 호의를 무시하더라. 갑자기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신세가 서러워서 밤엔 잠이 안 왔어.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커피 한 잔만 겨우 마시고 집을 나온 거야.     



  너도 코펜하겐에 인어공주 동상이 있는 거 알지? 안데르센 동화 ‘인어공주’를 테마로 1913년에 조각가 에드바르트 에릭슨이 제작한 동상이야. 규모는 좀 실망스러워. 누군가 그러더라. 왜 인어공주 동상으로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몰리는지 모르겠다고. 나도 자그마한 인어공주 동상을 보며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외로운 내 신세 같아서 가슴이 찡해지더라. 그래도 인어공주는 같이 사진 찍겠다고 난리 치는 관광객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나보다 나아 보였어. 

  인어공주 동상을 지나, 천천히 산책하듯 돌길을 걸어 게피온 분수로 왔어.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더라. 아말리엔보리 궁전을 구경하고 나왔을 때는 음울했던 기분을 떨쳐버릴 수 있었지. 내가 좀 단순하잖아. 배도 고파졌고. 버스를 타고 니하운 항구로 향했어. 코펜하겐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 내가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이지.  


 <2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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