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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Apr 02. 2019

콩트로 떠나는 유럽여행

열 번째 여행- 덴마크 코펜하겐

첫사랑 도둑 2


<1편에서 계속>


파스텔톤의 노랑, 주황, 초록, 하늘색 건물들이 눈부시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주욱 늘어선 항구의 풍경은 정말 환상이었어. 한때 이곳은 싸구려 선술집이 즐비했던, 선원들이 왁자지껄 떠들던 서민적인 항구였지. 지금은 멋진 레스토랑들이 들어선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됐지만. 나는 살짝 선술집 분위기가 나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어. 음식 맛이 좋았고, 진한 에스프레소도 정말 훌륭했지. 근데 여기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셨으면 더 좋았겠다 싶더라.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 우울해졌어. 아무리 내가 “혼자 다니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나왔지만, 전화는 고사하고 문자 한 통 없는 데보라한테 섭섭한 마음도 들고.       


 

  우울함을 털어버리려고 니하운 운하 크루즈를 탔어. 천천히 유람선을 타고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항구 경관과 코펜하겐 시내를 둘러보았지. 암스테르담보다 위도가 높아서 추울 줄 알았는데, 햇살이 좋아서 그런지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따뜻했어. 암스테르담의 운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물도 깨끗했고. 처음으로 코펜하겐으로 여행 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어. 

  그렇게 날이 저물도록 코펜하겐을 쏘다녔어. 시청사를 둘러보고, 시청사 광장 근처에 있는 안데르센 동상에서 관광객처럼 기념사진도 찍고, 스트르외에서 윈도쇼핑을 했지. 스트르외는 시청광장에서 콩겐스 광장까지 이어지는 1.2Km 거린데 보행자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야.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부티크들이 아기자기하게 즐비하게 이어져 있어서 볼거리가 참 많았어. 거리에는 악사를 비롯해서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들도 많더라. 작은 축제를 보는 느낌이 었지. 



  다리가 아프도록 돌아다니다 보니 날이 저물었어. 알지? 내가 원래 해 떨어지면 집에 들어가야 하는 집순이인 거. 습관대로 집에 가야 하는데, 한나와 마주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졌어.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다 아프더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한나네 집 벨을 눌렀어. 


  “와, 진주! 빨리 들어와. 같이 술 마시자.”


  얼굴이 발그레해진 데보라가 잔뜩 들떠서 나를 거실로 데려갔어.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거실엔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어. 빈 와인 병 하나가 뒹굴었고, 테킬라는 반쯤 비워졌고, 나초와 함께 맥주도 몇 병 놓여있더라. 한나의 눈이 게슴츠레 한 걸 보니 벌써 많이들 마신 것 같았어. 술기운 탓인지 한나의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 보이더라. 얼마나 다행이던지. 술이 약한 나는 데보라 따라주는 테킬라 대신 맥주를 홀짝였어. 그렇게 몇 잔, 술이 더 오갔을 때였어. 술 취한 한나가 흥흥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데보라가 사이다 같은 질문을 날렸어.


  “한나, 진주한테 뭐 불만 있어? 너 답지 않게 진주한테 왜 심술을 부리고 그래?”


  와, 감동. 데보라도 한나의 이상 행동을 눈치채고 있었던 거야. 내가 불편할까 봐 모르는 척했던 거지. 순간 꾹꾹 눌러 참았던 서러움이 삐질삐질 눈물처럼 삐져나왔어. 나도 정말, 진심으로 한나가 왜 나한테 못되게 구는지 알고 싶었거든. 아무리 술 취했다지만 한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았어. 몇 번이나 내가 뭘? 하면서 시치미를 떼더라.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데보라가 아니지. 데보라가 좀 집요한 면이 있거든. 결국, 한나가 자백처럼 이유를 실토했는데, 그게 참… 허무하더라.  


  “너무 닮아서. 아닌 거 아는데, 진주가 내 첫사랑을 뺏어간 여자랑 너무 닮아서 나도 모르게 화가 났었어. 미안해.”


  한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돼서, 그녀의 아픈 첫사랑을 털어놓았어. 그녀의 남자를 뺏어간 여자는 일본에서 유학 온 여자였대. 그냥 뺏어만 간 게 아니라 둘이 결혼까지 하고 일본으로 가버렸나 봐. 그러니 상처가 더 컸겠지. 오해는 풀렸지만 정말 허망하더라. 나랑 닮은 일본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신기하고. 그렇게 우리는 화해를 하고 좋은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어. 해피엔딩이었던 셈이지.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서 술국을 끓였어. 내 친구 데보라와 새롭게 친구가 된 한나에게 나의 비상식량인 냉동건조 북엇국을 끓여준 거지. 그런데 부엌으로 나온 한나가 이상했어. 자기 부엌을 함부로 쓴다고 막 화를 내는 거야. 당황한 나는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지. 그때, 데보라가 부엌으로 들어오며 소리쳤어. 


  “진주. 미안해. 한나가 어젯밤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얘가 술 취하면 필름이 끊기거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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