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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Apr 08. 2019

콩트로 떠나는 유럽여행

열 한번째 여행-프랑스, 콩크

  산티아고 프랑스 순례길을 걷다 1

    

  르퓌를 떠나 며칠 동안 험한 산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물집으로 너덜너덜해진 발바닥이 내지르는 비명소리에도 익숙해졌습니다. 오늘 아침, 산골마을 골라낙을 떠난 저는 드디어 콩크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발걸음은 천근만근입니다. 아무리 최소한으로 줄였다지만 어깨를 파고드는 배낭의 무게에 짓눌린 몸이 자꾸 휘청거립니다. 후유, 이런 저질 체력으로 어떻게 생장 드 포르까지 760km를 걸을 수 있을까, 눈앞이 캄캄해져 저절로 한숨이 날 때였습니다.  


  “괜찮으시면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건장한 체격에 금발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가 제 배낭을 들어주겠다며 총총걸음으로 다가왔습니다. 딱 들어도 알 수 있는 남자의 프랑스식 영어가 살짝 친근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는 제가 산티아고 프랑스 길을 걷기 시작한 도시 르퓌에서, 정확하게는 르퓌에 있는 산장에서 저를 처음 보았다며, 은근슬쩍 호감을 보였습니다. 말만 잘하면 비실거리는 저를 업고라도 갈 태세였습니다.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정중하게 사양하자, 남자가 저와 보폭을 맞추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만에 하나, 제가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눈빛이 역력했습니다. 힘들더라도 혼자 걷고 싶었는데, 졸지에 동행이 생겨버린 저는 파리지엔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 앙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콩크로 향했습니다. 

  그는 한국인인 제가 프랑스인들이 주로 선택하는 장장 1,572km나 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선택한 걸 신기해했습니다. 남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외국인들은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생장 드 포르에서 순례길을 시작한다는 것을. 

  저도 10년 전에, 그 길을 아내와 함께 걸었습니다. 40여 일 동안 아내와 저는 매일매일 투닥투닥거리면서도 바늘과 실처럼 붙어서 서로를 격려하며, 알콩달콩 히히 하하 웃으며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아, 지금도 812km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고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의 벅찬 감동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얼마나 감격했던지, 그날 우리는 10년 뒤에 다시 순례길을 걷자고 맹세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순례길 루트도 짰습니다. 프랑스 중부에 있는 르퓌에서 시작해 콩크와 무와삭을 지나 생장 드 포르까지 760km를 걸은 뒤,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812km를 더 걷자고.



  콩크로 들어서자 언덕 아래로 아름다운 동화마을이 보였습니다. 환상적인 중세마을 풍경이랄까. 수많은 돌집들이, 빛바랜 검은색 지붕과 햇살을 받아 크림색으로 빛을 내며,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재잘거리듯 서 있었습니다. 건장한 체격의 앙리도 아름다운 콩크의 풍경에 넋을 잃고 눈물까지 찔끔거렸습니다. 


  “3달 동안 순례를 마치고 나면,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생트 포와 교회가 보이는 마을 광장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던 앙리가 불쑥 촉촉해진 눈빛으로 물었습니다. 저도 자신에게 묻습니다. 순례를 마치고 나면 아내와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긴긴 방황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를. 앙리가 무엇 때문에 인생이 바뀌길 원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여주었습니다.    

  


  앙리와의 동행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체력이 바닥난 나와 달리 아직 기운이 펄펄 넘치던 그는 씩씩하게 카오르를 향해 떠났습니다. 콩크 마을에 마음을 뺏긴 저는 오늘 하루, 이곳에서 머물기로 하고 숙소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을을 산책했습니다. 정갈한 돌집들과 창문마다 걸린 형형색색의 예쁜 꽃 화분까지, 아내가 함께 왔더라면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을 것 같은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담장이 낮은 집을 지나갈 때는 빨랫줄에서 눈부시게 흰 빨래들이 펄럭 펄럭 춤을 추고 있더군요. 아내도 푹푹 삶아 새하얀 빨래들을 널어놓고 활짝 웃곤 했지요. 아내 생각에 자꾸 가슴이 저려옵니다. 못난 아들 때문에 가슴 졸이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입술을 앙다물어 봅니다. 내 평생의 짝이라고 여겼던 아내를 잃고, 무너져버린 아들을 위해 매일 새벽기도를 하시던 어머니의 눈물을 떠올리며 가늘게 한숨을 쉽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한국 분 맞으시죠?”


  숙소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데, 누군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야리야리 가냘픈 몸에 커다란 배낭을 멘 젊은 여자가 저를 보며 활짝 웃는데 왠지 낯설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더듬으며 바라본 그녀의 미소가 싱싱한 사과를 한입 베어 문 것처럼 상큼했습니다. 책을 내려놓는 제 입가에도 반가운 설렘이 피어났습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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