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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Apr 29. 2019

콩트로 떠나는 유럽여행

열세 번째 여행- 영국, 런던 

 런던을 걷다가 1    


  너와 이별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얼굴로 일상을 살아내는 중이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너로 가득했던 마음에 너덜너덜 구멍이 뚫리고, 숭숭 바람이 몰아쳤다. 나도 모르게 사라지는 너의 기억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날들이 늘어났다. 너와의 추억이 서린 거리를 떠돌았지만 허전한 가슴을 달래지 못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헤매다 무작정 런던 행 비행기를 탔다. 너의 흔적을 찾아, 나를 떠나보내려고.      


   

  워털루 역을 출발해 템즈 강변을 걸어서 다리를 건넌다. 바늘처럼 뾰족한 고딕 양식 건물, 국회의사당 건물이 보인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다양한 건축양식이 공존하고 있는 이 사원은 1066년 이래 왕의 대관식과 왕실의 결혼식 그리고 장례식이 거행되는 곳이다. 1997년에는 비운의 황태자비 다이애나의 장례식이 치러진 곳이기도 하다. 사원 앞은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평화로운 그들의 일상을 말없이 바라본다. 그날, 우리도 저들처럼 평화로웠던가.  

  아니었다. 그날, 우리는 뾰족해진 마음으로 템즈 강변을 걸었고 다리를 건넜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였던 것 같다. 둘 다 다혈질에 자존심이 강했던 우리는 작은 일에도 투닥거렸으나, 화해에는 늘 서툴렀다. 화가 나면 너는 침묵을 고집했다. 그날도 그랬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퉁퉁 부은 얼굴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둘러본 뒤, 말없이 세인트 제임스 파크를 향해 걷고 있었다. 예쁜 입술을 앙다물고 너는 터벅터벅 내 뒤를 따라 걸었다. 터벅거리는 네 발소리가 신경 쓰여 뒤를 돌아보았다. 새초롬한 네 얼굴이 아직도 뾰족했다. 이상하게 그 모습이 예뻤다. 눈꼬리는 사납게 올라갔고 앙다문 입술을 삐죽거리며 걷는 네가 너무 예뻐서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웃지 마!” 

  고슴도치처럼 신경질을 부리던 너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우리 맥주 마시러 펍에 갈까?” 

  너의 눈매가 순해지는가 싶더니, 네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흘렀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풍경이 휴일처럼 나른하다. 아기를 데리고 소풍 나온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너와 매일 그랬던 것처럼. 

  런던에서 우리는 오래된 부부처럼 서로를 바라보곤 했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부를 따라 걸으며, 우리가 결혼하면 아이는 몇 명을 낳을까 이야기하며 미소 짓곤 했었다. 선한 너의 눈을 닮은 아들이 좋을까, 너처럼 길고 게으른 손가락을 가진 딸은 어떨까, 둘 다 낳으면 더 좋고. 이렇게 우리의 미래를 핑크빛으로 채색할 때, 네 뺨이 발그레 붉어지던 모습을 내 가슴이 기억한다. 그때 우리는, 우리에게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바보처럼.       



  어제는 네가 좋아하던 노래를 들으며 종일 숙소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너를 떠나보내지 못한 가슴이 물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흘러가는 강물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강은 듣기만 하더라. 내 가슴이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강 물결의 침묵이 더 무겁게 내게로 다가왔다. 

  우울을 털어내려고 런던을 다시 걷는다. 밀레니엄 다리를 건너자 세인트 폴 대성당이 보인다. 거대한 돔을 씌운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런던을 대표하는 성당이다. 1666년 런던 대화재로 전소된 성당을 건축가 런 경이 35년간 재건했단다. 1981년,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찰스 왕세자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성당 구경을 마치고 15번 버스를 탄다. 옛날에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전망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2층으로 올라가 앉는다. 템즈 강변에 자리한 런던탑은 분위기 좋은 고성 같다. 이곳은 윌리엄 1세부터 제임스 1세까지 역대 왕들의 거처이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우리에게 런던탑은 감옥으로 더 유명하다. 무서운 단두대와 섬뜩한 고문도구 앞에 서 보았다. 단두대에서 장난스럽게 사진을 찍던 네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때는 즐겁기만 했는데, 나 혼자 단두대를 보고 서 있으려니 왠지 오싹해진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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