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페리고르-
1장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

by 소심한 삘릴리

1.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


그의 지친 시선이 벽시계로 향한다. 아침이 참 길다. 7시 11분. 평소 같으면 연구소로 가는 통근 버스를 타러 나갈 시각이다. 그의 아파트가 있는 비올레트 가를 지나 시뇨레트 거리를 걸으며, 어김없이 시작되는 하루를 무료해하고 있을 때다. 그러고 보니, 어제 통근 버스 기사에게 오늘부터 휴가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새로 온 기사는 남프랑스 사람답지 않게 성격이 급했다. 아마 30초쯤 그를 기다려주는 척하다가 서둘러 버스를 출발시킬 것이다.

태주는 다 마신 커피잔을 싱크대로 가져가 천천히 설거지하고 집안을 둘러본다. 아내의 부재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정갈하다. 이만하면 됐어. 저절로 거만해지는 미소를 띤 그의 시선이 거실 창으로 향한다. 닫힌 덧문 사이로 늙은 고양이 같이 암울한 햇빛이 야금야금 들어서고 있다.

파리 리옹 역을 출발한 테제베가 엑상프로방스 테제베 역에 도착하려면 아직 2시간이나 남았다. 집에서 테제베 역까지 차로 30분 거리. 교통 체증을 고려하더라도 시간은 충분하다.

1시간이나 여유가 있다. 뭘 하지? 갑자기 받아 든 숙제처럼 남은 시간이 버겁다. 들뜬 마음으로 소풍을 나왔다가 길을 잃은 아이처럼 태주는 산만하게 거실을 서성인다. 문득 이웃집에 좀도둑이 들었다며 호들갑을 떨던 관리인의 말이 떠오른다. 태주는 흐트러지는 마음을 옭아매며 전등 스위치를 켜고 다시 문단속을 한다.

그의 아파트를 감싸 안은 덧문은 어젯밤에 닫아 놓은 상태 그대로다. 노트북은 침대 매트리스 아래 깊숙하게 숨겨 놓았다. 중요한 자료가 든 외장 하드는 싱크대 그릇장에 감추어 두었고 아내의 폐물들은…… 갑자기 태주의 등골이 서늘해진다.

맞다, 아내를 확인하지 않았다.

불쑥 걸려올지 모를 아내의 전화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뻔했다. 도둑질하다 들킨 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당황하면 안 된다. 후유, 길게 숨을 몰아쉰 그는 침착하게 서울 집으로 전화를 건다. 최선의 방어는 최고의 공격이다. 아이 울음 같은 전화벨이 계속 울린다. 받지 않는다. 아직 아내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던가, 아니 외출이라도 한 것인가. 아니다. 아직 화가 안 풀린 아내가 시위하듯 그의 전화를 무시하고 있는지 모른다. 차라리 잘 됐다. 이럴수록 그는 당위성을 갖게 될 테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태주는 아내의 휴대폰 번호를 누른다. 전원이 꺼져있다는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순간, 출발을 앞두고 설레던 마음이 찬물 세례를 받은 것처럼 움츠러든다.

아내를 잊고 있었다니, 아무리 여행 때문에 들떠 있었더라도 아내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말도 안 된다. 아내와 냉전이 길어질수록 처신을 잘해야 한다. 제 발 저린 도둑처럼 태주의 머릿속은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그래. 수정이가 있다. 황급히 딸의 번호를 찾는 그의 손이 사르르 떨린다. 수정의 스마트폰도 묵묵부답이다. 벨소리가 끊어지는가 싶더니,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맹맹한 기계음이 흘러나온다. 태주는 흠흠 목소리와 함께 마음을 가다듬는다.

“아빠다. 잘 지내지? 어, 내가 3박 4일 정도 출장을 가거든. 어, 멀리 가는 건 아니고, 같은 프랑스 지역인데…… 혹시 연락이 안 될 수도 있어서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했어. 엄마한테도 그렇게 전해주고. 그럼, 다녀와서 전화 하마.”

갑자기 구차한 생각이 들며 울컥 짜증이 치민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아내다. 아내가 무책임하게 그를 버려두고 서울로 돌아가 연락을 끊지 않았더라면, 이번 여행은 꿈도 꾸지 않았을 거다. 어쨌든 아내는 지금 프랑스에 없고 그는 옛사랑의 러브콜을 받았다. 어찌 감히 그녀와의 밀월여행을 거역하겠는가.

출발 시각이 다 됐다. 태주는 현관에 세워둔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덜컹거리며 40년이 훨씬 넘은 엘리베이터가 충실한 개처럼 그를 향해 다가온다.

태주의 옅은 청회색 푸조가 엑상프로방스를 빠져나와 마르세유로 가는 A51 고속도로 접어든다. 다행히 고속도로가 한산하다. 6월 프로방스 하늘이 지중해를 옮겨 놓은 듯 새파랗다. 작년 이맘때 은서를 만나던 날, 파리 하늘도 저렇게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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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와의 재회는 운명 같았다. 지금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인연의 끈이 태주와 은서를 끈끈하게 옭아매며 다가왔다. 모르겠다. 23년간 방치된 상태로 풀려있던 인연이 언제 어떻게 그들을 잡아매기 시작했는지. 학회를 마치고 리옹 역으로 가던 태주가 불쑥 버스에서 내리던 순간이었는지, 아니면 판테온을 나와 소르본 대학을 따라서 걷던 순간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사진을 찍다가 요의를 느끼고 카페로 들어서던 순간이었는지.

그날, 그는 소나기를 피하는 행인처럼 카페로 뛰어들었다. 공중화장실이 없는 거리에서 볼일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은 카페밖에 없었다. 우선 화장실부터 가려고 테라스를 지나던 그는 숨이 멎을 것 같은 환상과 마주 섰다. 조금 전까지 터질 것처럼 그의 아랫배를 옥죄던 요의가 비겁한 도망자가 되어 꽁무니를 뺄 정도로 강한 충격이 그를 강타했다.

그곳에 은서가 있었다.

탐스럽고 통통하던 핑크빛 뺨이 고독한 수녀의 엄숙함으로 변했고, 긴 생머리가 단정한 웨이브 커트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스물한 살 모습을 간직한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거짓말 같은 현실이었다.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적막이 흘렀다. 화살촉처럼 날카로운 햇살이 카페 창을 뚫고 들어와 한 줄기 빛으로 반짝였다. 얼마나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정신을 차린 태주는 자석에 끌리듯 은서 앞에 마주 앉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젖은 시선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은서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옛사랑과 재회한 남자는 대체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까. 그동안 잘 살았니? 어디서 어떻게 지냈어? 결혼은 했고? 아이들은? 아무래도 이런 평범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지. 태주가 입안을 맴도는 말들을 걸러내려고 애쓸 때였다.

“그때 왜 그랬어?”

톡 쏘아붙이듯 입을 뗀 은서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때라니, 태주는 허점을 찔린 사람처럼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싸울 때마다 헤어지자던 내가 지겨웠어?”

은서의 목소리가 가파르게 높아졌다. 주위의 시선이 태주에게로 향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이 같았다. 그녀는 아직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를 원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허, 23년 만의 재회를 싸움으로 시작하다니, 어처구니없으면서 정겨웠다. 불같이 사랑하고 죽일 듯이 싸우던 옛날 기억들이 한순간 몰려들었다. 푸릇한 그녀의 젊음도 새삼 아프게 다가왔다. 태주의 기억 속에 묻혀있던 은서의 실체가 눈물 나도록 아름답게 피어났다. 맨 정신으로 그녀를 바라보기 힘들었다.

“우리 와인 한잔할래?”

웨이터를 불러 와인을 주문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선선해진 그녀의 눈빛이 선선하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화를 내다가 무방비 상태로 풀어지는 그녀의 버릇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울컥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을 타고 목울대로 솟구쳤다. 삶에 생채기를 남기며 흘러간 세월도 그녀의 천성을 건드리지 못했다. 아련한 정겨움에 태주의 코끝이 찡해졌다.

와인은 첫 잔부터 달콤했다. 타닌 맛이 강한 보르도 와인이 달콤할 리 없으나 태주에게는 그랬다. 그는 암울한 보라색 와인과 함께 불완전 상태로 박제되어 버린 그의 과거를 마셨다. 하고 싶은 말들은 계속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때 왜 그랬느냐고 따져 묻던 은서는 더는 그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대신 그간 살아온 날들을 독백처럼 풀어놓았다. 프랑스인과 사랑하고 결혼했으나 결국 이혼한 이야기.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고, 하나뿐인 아들이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그녀의 현재를 푸념처럼 들려주었다.

헤어지던 날의 기억을 되짚었더라면 속마음을 털어놓았을까, 태주는 와인에 젖어들며 생각했다. 그녀에게 왜 헤어지자고 했었는지, 그가 얼마나 통한의 눈물을 흘렸는지, 스치는 바람에도 그녀를 그리워하던 기억들은 또 얼마나 소중하고 부질없었는지. 군에서 부상당하고 1년간 병상에 누워있던 날의 악몽과 의병 제대를 하기 무섭게 그녀를 찾았으나, 이미 그녀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뒤였다는 사실은 말하지 못했다. 그의 삶이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는 이야기도 차마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녀를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다. 달콤하던 와인은 그를 집어삼킬 듯 광폭해져 갔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카페 앞, 작은 분수대 위로 떨어지는 석양을 느끼며 태주는 자신의 삶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현실을 벗어던졌다.

다음 날, 빗소리에 잠을 깬 태주는 부스스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이트 공간에 하이그로시 붙박이장과 엔틱 한 콘솔 겸 화장대.

여기가 어디지? 낯선 곳에 버려진 고아처럼 태주는 외로운 얼굴로 침대를 빠져나왔다. 하마터면 바닥에 뒹굴던 와인 병을 밟고 넘어질 뻔했다. 그제야, 카페를 나서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분 좋게 취한 그들은 택시를 탔고, 그녀의 집에서 다시 와인을 마셨다.

거실로 향하던 태주는 방문에 붙은 메모지를 발견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간다는 은서의 메모에는 잘 가라는 인사도 없었다. 태주는 거실 창가에 서서 에펠탑을 바라보며 아내가 끓여주던 따끈한 북엇국을 생각했다.

비록 은서를 마음에 품었어도 몸은 아내를 배신한 적 없었다. 그것이 부부간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구차하게 변명은 하지 않더라도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스마트폰을 꺼내보니 꺼져있었다. 배터리 충전하는 걸 깜박했나 보다. 태주는 식탁 위에 명함을 놓아두고 그녀의 집을 나왔다. 지난밤의 일이 모두 꿈같았다.

그날 이후, 정신없이 이어진 그의 삶과 일상 속에 은서가 존재했는지 아닌지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피폐해진 삶에서 사소한 일상을 기억하는 일은 이제, 그에게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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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40분 무료주차장 맞지?”

주차장으로 들어서던 태주는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는다. 조수석에서 아내 목소리가 났다. 모골이 송연해진 태주는 빠르게 고개를 돌린다. 아내는 없다. 당연하다. 서울에 있는 아내가 여기 있을 리 없다. 더구나 아내는 지금 태주가 은서와 여행을 가리라곤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아무리 직감이 빠른 아내라도 눈치챘을 리 없다. 그런데 왜 자꾸 바람피우다 들킨 사람처럼 뒤통수가 따가운지 모르겠다. 부릅뜬 눈으로 조수석을 노려보던 태주는 힘차게 고개를 젓는다. 쓸데없는 상념 따위에 사로잡혀 여행을 망칠 수 없다.

주차를 마친 태주는 서둘러 테제베 역사로 들어선다. 익숙한 에스엔쎄에프(SNCF) 시그널과 함께 파리 리옹 역을 출발한 테제베가 곧 엑상프로방스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