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페리고르-
2장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by 소심한 삘릴리

2.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테제베가 막 파리 리옹 역을 벗어났다. 비로소 긴장이 풀린다. 은서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는다. 피곤한 몸과 달리 정신이 점점 또렷해진다. 한 시간이라도 눈을 붙여야 오늘 여행에 무리가 없을 텐데, 잠을 청할수록 신경이 곤두선다. 옆자리 남자에게서 슬쩍슬쩍 풍겨오는 알뤼르 옴므 향이 그녀를 자극한다. 하필 전남편 줄리앙과 향수 취향이 같은 남자라니, 마음에 안 든다.

은서와 줄리앙의 인연도 참 질기다. 그녀의 프랑스 생활과 함께 시작됐으니 올해로 23년째다. 1년간 연애를 했고, 2년 동안 동거하다가 결혼해서 10년을 살았다. 이혼하고도 그와 완전히 헤어지지 못하고 어정쩡한 친구와 연인 사이로 지낸 것이 벌써 10년째다. 처음에는 아들 레오 때문에 전남편과 관계를 완전하게 끊지 못했다. 그가 외로운 타국살이를 하는 은서에게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는 것도 싫지 않았다. 문제는 그녀였다. 걸핏하면 친구와 연인의 경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상처를 받곤 했다. 지겹다, 지겹다 하면서도 은서는 줄리앙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도 그랬다. 그즈음 줄리앙은 툭하면 그녀의 갤러리를 찾아왔다. 첫날은 오페라를 함께 보자더니 다음에는 예매한 영화 표를 흔들어 보이며 아이처럼 웃었다. 며칠 후, 새로 오픈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던 날에는 아예 은서네 집에서 자고 갔다.

“레오 생일에 같이 런던 갈까?”

달콤한 섹스를 끝내고 담배를 피우던 줄리앙이 물었다. 그녀가 미소로 답하자 당장 레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은 이혼한 부모가 사이좋게 생일을 축하해 주러 온다는 소식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모처럼 세 식구가 타임 브리지를 바라보며 저녁을 먹을 생각에 그녀도 한껏 들떴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부추겨 놓고 뒤통수를 치는 것. 은서가 못 견뎌하던 줄리앙의 고약한 습성에 바보처럼 또 넘어가고 말았다. 매번 약속을 깨는 이유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솔직했다. 차라리 클라이언트와 급한 약속이 생겼다고 핑계를 대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이번에도 줄리앙은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했다.

“쉐리, 정말 정말 미안해. 글쎄, 소피가 크루즈 여행을 예약했지 뭐야.”

“그래서?”

그는 여전히 이혼한 아내를 쉐리로 불렀다. 은서는 자신을 여보,라고 부르는 그의 달짝지근하고 살가운 목소리가 싫지 않았으나 속이 뒤틀릴 때는 아이 울음소리처럼 짜증이 났다. 이번에도 그랬다.

“우리 런던은 다음에 가자. 나, 지금 마르세유 항구로 가는 길이야.”

“못 간다는 전화를 왜 이제야 했는데?”

“미안해 쉐리! 여행 전에 처리할 일이 많아서 너무 바빴어.”

“그렇다고 전화도 못 하니?”

“쉐리, 화 많이 났구나? 내가 여행 다녀와서……”

“됐어.”

“쉐리……”

“그만! 제발 그 쉐리 소리 좀 그만해! 우리가 아직 부부니? 이젠 정말 끝이야. 너, 다시는 안 봐!”

은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전화기를 집어던졌다.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이젠 정말 끝이야. 은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매번 되풀이되는 상황에 진저리가 났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이렇게 난리를 치다가도 한두 달 후에 다시 줄리앙의 달콤한 속삭임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그녀 자신이었다. 은서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아들에게 전화해 상황을 알렸다.

“됐어. 엄마도 오지 마.”

레오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아들은 아빠한테 실망할 때마다 은서에게 짜증을 냈다. 아들을 이해하면서도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누명을 쓴 죄인처럼 억울하고 속상했다. 은서는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자꾸 눈물이 차올랐다. 갤러리를 나와 무작정 걸었다. 그녀의 발길이 소르본 대학으로 향했다. 단골 책방에 들려 책 냄새를 맡으면 시린 마음이 나아질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은서는 줄리앙에게 상처를 받을 때마다 태주를 떠올렸다. 아주 오래된 습관이었다. 태주와 그렇게 허망하게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줄리앙을 만나 평생 가슴앓이를 하지 않았으리라는 이기적인 망상에 사로잡혔다.

처음에는 태주를 원망했다. 그녀의 불행을 모두 태주의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줄리앙과 이혼한 뒤에는 태주를 찾아볼까 갈등하다 그만두기도 했다. 그를 찾고 옛사랑을 뒤적인들 현실이 나아지거나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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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책방을 나온 은서는 카페로 가며 잠시 태주를 떠올렸다. 그와 헤어지던 날의 아픈 기억이 제 몸을 불리는 괴물처럼 되살아날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된다, 정신 차려야 한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며 미친 듯 고개를 흔들어 오래된 기억을 털어내려 애썼다. 그렇게 나쁜 습관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커피를 주문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파리 하늘이 이렇게 환하게 빛나는데, 자기 표정은 왜 그렇게 우울해?”

단골 카페 주인이 새로 만든 디저트를 서비스로 가져다주며 그녀에게 말을 걸어올 때였다.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드는데, 호리호리한 동양 남자가 카페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무심하던 그녀의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남자가 낯익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 태주와 참 많이 닮아 보였다. 아니 태주가 분명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놀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눈꺼풀을 의식하며 생각했다. 이건 꿈이라고. 그에게로 향했던 무의식이 허구의 형상을 만들어 낸 것이 틀림없다고.

우선, 23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고도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는 사실부터 이상했다. 침착해야 한다, 침착하자. 은서는 속으로 수없이 다짐하며 다시 눈을 떴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녀를 알아본 태주가 자석에 끌리듯 그녀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으로 수없이 그를 떠올렸지만, 그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구나 이곳 파리에서.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비현실처럼 펼쳐지자 이성을 잃고 말았다.

무엇보다 그가 왜 그녀를 떠났는지 알고 싶었다. 그날은 전쟁 같던 그들 연애의 한 소절일 뿐이었는데, 왜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돌아섰는지. 제풀에 지쳐 돌아올 줄 알았는데 왜 영영 몸을 숨겼는지. 뒤늦게 자취방으로 학교로 그를 찾아 나선 은서의 좌절을 짐작이나 했는지. 그녀의 가슴에 남은 멍울이 얼마나 아팠는지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니까 왜 그리 허망하게 그녀를 떠났는지 따져 묻고 싶은 거였다.

“그때 왜 그랬어?”

당장에라도 울 것 같았던 그녀의 질문은 허공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을 뿐이었다. 은서는 지나온 세월을 인정하고 순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젊은 날 그녀를 사랑으로 가슴 뛰게 했던 남자가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 겉돌았다. 그래도 좋았다. 은서는 마음속에 가득 찬 이야기를 우리말로 떠들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머릿속에서 불꽃이 터지는 기쁨이랄까. 줄리앙과 수없이 나눈 애증의 교차점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환희였다. 은서는 그렇게 온몸을 던져 태주에게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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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그녀는 낯선 벨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비몽사몽 여명에 의지해 주위를 더듬거렸다. 잠든 태주의 탄탄한 어깨가 만져졌다. 가늘게 코 고는 소리도 들렸다.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소리를 따라 어름어름 침대를 빠져나왔다.

태주의 겉옷 주머니에서 그의 스마트폰을 꺼내자 ‘아내’라고 쓰인 여자가 액정화면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순간, 가벼운 마음으로 밤길을 산책하다가 불쑥 나타난 귀신을 본 듯 소름이 끼쳤다. 곤히 잠든 태주와 스마트폰을 번갈아 보는 은서의 심장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찢어지기 시작했다. 마음에서 시작된 균열은 광속도로 그녀의 몸을 조각냈다.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자신을 느끼며, 공포에 젖어 덜덜 떨고 선 그녀에게 스마트폰 속 태주의 아내가 “박은서. 너도 똑같아”라며 비웃음을 날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공포가 몰려왔다. 저절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느라 입술을 악물었다. 비릿한 핏물이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징그러운 벌레를 털어버리듯 스마트폰을 그의 주머니로 던져 넣었다. 다행히 벨 소리가 멈췄다.

은서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발등에 커다란 못이 박힌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제 발등을 찍으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은 그녀의 얼굴은 평생 그녀를 비참하게 짓누른 줄리앙의 여자들과 똑같이 닮아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피해자에서 피의자로 신분이 바뀐 뻔뻔한 현실이 진저리 나게 부끄럽고 싫었다. 부글부글 자기혐오가 끓어올랐다. 이대로 있다가 마그마가 분출하듯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미친 듯 집안을 서성이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던 그녀는 결국, 짧은 메모를 남기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오늘은 아빠랑 하일랜드 글랜코로 갈 거야.”

레오의 전화가 까무룩 잠들었던 은서를 깨운다. 테제베는 어느새 남프랑스 지방으로 접어들었다. 작년에 아들의 생일을 저버렸던 줄리앙은 레오와 함께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모처럼 아빠 노릇을 하는 중이다.

그를 조금씩 인생에서 밀어내고 있는 은서는 스코틀랜드로 가는 대신 태주에게 페리고르 여행을 제안했다. 파리로 출장을 왔던 동아리 동기 민석에게 태주가 아직 남프랑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냈다.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다시 자신에게 다짐한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주위 사람들도 신경 쓰지 말자. 오직 태주에게만 집중하자고.

레오와 통화가 끝날 무렵 테제베가 아비뇽 역에 멈춰 선다. 5분간 정차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매년 7월이면 연극 축제가 열리는 도시 아비뇽. 이혼하기 전, 줄리앙의 출장을 따라나섰다가 들렀던 곳이다. 마침 연극축제가 한창이어서 소풍 나온 어린아이들처럼 들뜬 얼굴로 도시를 쏘다니던 기억이 난다. 영롱한 다이아몬드의 향연처럼 태양 빛이 쏟아지던 교황청 광장 카페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교황청 옆 언덕길을 올라가 암벽 위에 만들어진 로쉐돔 공원에서 론 강을 바라봤었다. 끊어진 아비뇽 다리를 바라보던 줄리앙은 개구쟁이처럼 학교 다닐 때 배운 ‘아비뇽 다리’ 노래를 불렀다. 이런, 또 줄리앙 생각을 하다니.

은서는 입술을 쭉 내밀며 길게 한숨을 뱉는다.

사랑과 삶은 추억이라는 찌꺼기를 남긴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사랑하든, 미워하든, 줄리앙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존재하는 한 은서는 그를 떠나 자유로울 수 없다. 그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그녀는 자기 최면을 걸듯 태주를 떠올린다. 오래되고 사소한 그와의 추억이 안타깝다. 괜찮다. 많이 안다고 많이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추억이 많다고 더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테제베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음 정차할 역은 엑상프로방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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