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순례자 마을, 콩크
산속 마을 콩크가 10km 남았다는 표지판을 지날 때, CD 플레이어에서 샤를 트레네의 ‘라 메르’가 흘러나온다. 산속으로 들어가며 듣는 바다 노래가 먼 길을 돌아와 다시 만난 두 사람의 여정 같다.
은서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태주를 바라본다.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조심스레 운전하는 얼굴에 옅은 긴장이 감돈다.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이 진지한 모범생 같다. 앙다문 입술선이 유난히 곱다. 선이 고운 그의 입술에는 허겁지겁 그녀를 탐하던 뜨거운 열정 대신 수줍은 미소가 어려 있다. 달콤한 밀크셰이크 같던 그와의 키스를 떠올리자, 은서의 뺨이 수수처럼 붉어진다. 괜히 민망해진 그녀는 흥얼거리듯 노래를 따라 부르며 창밖을 바라본다. 봄에 돋아난 연초록 여린 잎들이 어느새 성숙한 수박색으로 짙어졌다.
“기억해?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네가 이 노래 불렀잖아.”
태주가 손을 뻗어 은서의 손을 그러쥔다. 새삼, 은서의 콧등이 시큰해진다. 낡고 오래된 추억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 그녀에게 소곤소곤 말을 걸어온다.
태주가 처음 대학연합 노래패 동아리방으로 들어서던 날, 은서는 선배의 기타 반주에 맞춰 샤를 트레네의 ‘라 메르’를 부르고 있었다. 아직 정기모임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일찍 도착한 멤버들이 화음에 맞춰 좋아하던 샹송을 부르고 있었다.
벌컥 동아리방 문이 열리고 낯선 얼굴이 들어섰다.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아주 잠깐 노래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녀의 목소리도 살짝 흔들렸다. 그가 민석이 옆으로 다가가 앉는 순간, 그녀의 마음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노래에 섞이면 절대로 안 되는 짧은 한숨이었다. 노래를 부르며 그녀는 슬금슬금 곁눈질로 그를 흘끔거렸다. 18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큰 키에 창백하게 흰 얼굴, 검은 갈색으로 빛나는 머릿결에 웨이브 파마를 한 것 같은 반 곱슬머리, 쌍꺼풀 없이 크고 긴 눈에 오뚝하게 높은 코, 샤프한 턱선 그리고 꽃잎처럼 윤곽이 예쁜 입술까지. 틀림없는 민석의 친구 태주였다. 그녀가 친구라는 방패를 앞세우며 민석을 거절할 때마다, 오기를 부리듯 자랑하던 그의 친구 태주가 틀림없었다. 보지 않았어도 알 것 같은 얼굴, 태주를 알아본 그녀의 귓불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소개할게요. 제 친구 김태줍니다. 이제 막 재수를 끝내고 S대 공대에 합격했어요.”
노래가 끝나자, 민석이 태주를 소개했다. 입학도 하기 전에 태주를 동아리로 끌어들인 민석의 속셈이 뻔히 보였다. 야릇한 민석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어때, 내 친구 멋있지? 흥, 콧대 높은 박은서도 내 친구 태주 앞에선 속절없이 무너질걸? 그가 거만한 시선으로 그녀에게 으스댔다. 은서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자꾸 태주에게로 향하는 눈길을 거두며 생각했다. 꼭 그의 여자가 되고 싶다고.
의외로 태주는 쉬운 상대였다.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는 부산물처럼 그의 마음이 은서에게 다가왔다. 불쑥불쑥 재채기가 터지듯, 순진하게도 태주는 그녀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민석이 코치를 해도 소용없었다.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거짓말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소년처럼, 그의 얼굴에는 은서를 향한 열망과 애정이 배어있었다.
그럴수록 은서는 침착해졌다. 적당히 밀고 당기며 그를 애태웠다. 동아리 선배로서 친절을 베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차갑게 돌변했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윽하게 와닿는 태주의 시선도 외면했다. 한 번은 새침하게, 두 번은 거만하게 눈길을 무시하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동아리 활동 중에는 생글생글 웃다가도 모임이 끝나면 차가운 얼음공주로 돌변했다. 동아리 회식을 하는 날엔 그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고,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쌩하니 고개를 돌렸다.
“우리 셋이서 밥 먹으러 갈래?”
민석이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태주를 데려다 놓기만 하면 저절로 치졸한 복수가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애써 준비한 반격의 카드가 맥을 못 추자 성격 급한 민석이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했다.
“미안. 내가 좀 바빠서.”
이런 실랑이가 한동안 계속됐다. 사실 은서도 불안했다. 태주에게 노골적으로 호감을 보이는 1학년 여자 후배들이 신경 쓰였다. 이러다 그를 뺏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마음이 급해졌다.
마침 기회가 왔다. 동아리 정기공연이 끝나고 술자리가 이어지던 날, 은서는 자연스러운 얼굴로 태주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어이, 1학년. 선배한테 술 한 잔 따라 봐. 태주는 은서의 갑작스러운 넉살에 허둥거렸다. 은서의 변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술을 따르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나 좀 데려다 줄래?”
술자리를 끝내고 일어설 때, 은서는 중심을 잃은 발레리나처럼 태주에게로 쓰러지며 신음처럼 속삭였다. 그녀를 부축하던 그의 팔에 미세하게 경련이 일었다. 그녀를 데려다주는 동안 태주는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마음을 들킨 소년의 순수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은서는 그런 그가 너무 좋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고, 그 떨림을 이기지 못해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너, 키스해 봤니?”
용기를 낸다고 꺼낸 말이 너무 앞서갔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태주는 독주를 마신 듯 얼굴이 붉어지며 어쩔 줄 몰라했다.
“아, 아니 아직…… 넌?”
“나도.”
풀 죽은 목소리와 함께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호기롭게 선수를 쳤으나 뱉어낸 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잠시 미쳤던 것 같다. 어쩌자고 엄청난 말을 꺼낸 건지 모르겠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주워 담고 싶었다. 죄인처럼 그녀의 고개가 저절로 숙어졌다. 먹구름 같은 어색함이 둘 사이를 짓눌렀다. 버스정류장에서 그녀의 집까지, 두 사람은 어두운 침묵 속을 걸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성북동 주택가 번듯한 이층 집을 가리키며 은서가 아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성채처럼 담장이 높았고, 육중한 대문을 비추는 외등이 별처럼 고운 집이었다. 겸손한 미소를 짓고 있으나 거만함이 느껴지는 그런 집이었다.
“어서 들어가.”
태주가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그녀와 이층 집을 번갈아 본 뒤, 의무를 다한 군인처럼 짧은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였다.
“저기, 태주야.”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잡았다.
“저기 있잖아. 우리, 성년 되는 날…… 그거 해볼래?”
데이트라고도 할 수 없었던 둘만의 첫 만남에서 그녀는 당돌하게 첫 키스를 말했다. 그의 뺨이 산성용액을 머금은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붉게 물들었다.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다 후후 거리며 벅찬 숨을 뱉어냈다. 툭, 시한폭탄을 던져놓은 은서의 가슴도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궤도를 잃은 기차처럼 질주하는 그녀의 심장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것 같았다.
“좋아. 대신 딴소리하기 없기다.”
일생일대의 결심이라도 한 듯, 태주가 은서를 마주 보며 말했다.
“어? 어, 어.”
태주의 단호한 얼굴을 바라보며, 은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게 용기를 냈으나 감당할 자신이 없어진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그때, 커다란 손이 슬그머니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남자 손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말랑말랑 보드라운 손이었다.
“연애하려면, 우선 손부터 잡아야지?”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됐다. 태주가 동아리방으로 들어선 지 3달 만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에 가장 놀라고 당황한 사람은 민석이었다. 1년 동안 짝사랑하던 은서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자, 홧김에 태주를 동아리로 불러들인 것인데, 잘생기고 똑똑한 태주가 콧대 높은 은서를 꼬여낸 다음 보기 좋게 차 버리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두 사람을 맺어주게 되었다며, 진탕 술을 마시고 대성통곡하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물론 태주가 등장하던 순간부터 그녀는 민석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도 복수해 달라는 친구의 사주를 받은 태주의 마음이 어땠는지 궁금했다.
“동아리방으로 들어서던 순간, 네가 부르던 ‘라 메르’가 나를 휘감았어. 감전된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일었지. 겨우 용기를 내서 노래를 부르는 너를 응시한 순간, 그만 사랑에 휩쓸렸던 것 같아. 오호츠크 해 겨울바람처럼 거세게 몰려오는 사랑 말이야. 그제야 알겠더라. 왜, 그동안 민석이가 툭하면 재수학원으로 찾아와 쓴 소주를 마시며 눈물을 쏟았는지.”
그의 고백에 가슴이 뜨거워진 그녀는 용감한 전사처럼 그에게로 돌진했다. 벚꽃 잎이 소낙비처럼 쏟아지던 봄밤이었다. 첫 키스를 하기로 약속한 날을 한 달이나 앞둔 따스한 봄날, 은서는 그의 뜨거운 입술에 스무 살의 열정을 쏟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첫 키스의 추억은 민트 초콜릿보다 쌉싸름하고 달콤했고, 첫 키스의 기억은 불에 덴 상처보다 더 선명했다. 그 후, 은서는 태주를 사랑하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와의 사랑은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했고, 핫초코에 마시멜로를 넣어 먹는 것처럼 달콤했다. 그때, 그녀는 사랑의 뒷모습을 보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사는 것처럼 사랑도 그렇게 흘러갈 줄 알았다.
“세상에, 여기 완전히 동화 나라 같아!”
마을 입구를 지나, 주차장을 찾아 언덕을 오를 때였다. 은서가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지른다. 태주도 창밖의 경치에 말을 잇지 못하며 차를 세운다. 발아래로 오롯이 중세시대를 그대로 재현한 아름다운 동화 마을이 보인다. 빛바랬으나 여전히 검은색 위용을 뽐내는 지붕과 햇살을 받아 크림색으로 빛나는 돌집들이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재잘거리듯 서 있다. 그림책을 넘기다가 만난 환상의 순간 같다. 수많은 프랑스의 아름다운 마을들을 돌아다녔던 은서지만 콩크의 자태는 특별하다.
“이렌느? 나야 은서. 으응, 지금 네 말대로 콩크 언덕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어.”
은서가 종달새처럼 흥겹게 이렌느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와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고 있는 십년지기 친구, 태주와의 여행이 그녀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친구다.
“어때, 내 말이 맞지? 가슴이 벅찰 정도로 멋있지?”
“으응. 이렇게 멋진 곳을 알려줘서 정말 고마워.”
“와, 나, 지금 행복해하는 네가 보이는 거 같아. 꼭 영상 통화하는 기분이야.”
“하하, 내 목소리가 너무 들떴지?”
“아니. 내가 너였더라면, 더 흥분해서 소리소리 질렀을 걸?”
“맞아, 이렌느.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죽을 것처럼 좋아.”
“하하, 죽기 전에 할 일이 하나 더 있어.”
“뭔데?”
“콩크 언덕에서 석양을 보는 거야.”
“석양?”
“응. 일단 석양을 봐. 그럼, 내가 왜 석양을 보라고 했는지 알게 될 거야.”
평소와 달리 이렌느도 한껏 들떠있다. 쾌활한 그녀의 목소리가 봄날의 화사한 햇볕처럼 은서의 가슴으로 따뜻하게 스며든다.
주차장을 나온 은서와 태주는 마을로 향한다. 천천히 돌담길을 따라 걷는데 허기가 진다. 벌써 2시가 지났다. 은서의 눈이 자연스럽게 레스토랑을 찾을 때였다.
“점심은 대충 샌드위치로 먹을까?”
관광정보센터에서 마을 정보 팸플릿과 지도를 잔뜩 들고 나온 태주가 샌드위치 가게를 턱으로 가리키며 은서를 바라본다.
“집에서 먹는 음식을 여행 와서까지 먹는 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은서는 화들짝 놀란다. 전남편 줄리앙이 습관처럼 하던 말이다. 미식가 줄리앙은 여행할 때마다 꼭꼭 숨겨진 맛집을 찾으러 다니던 사람이었다. 습관의 힘은 무서웠다. 먹는 행위에 관심 없던 은서도 줄리앙의 영향을 받아 어느새 여행지에서 맛집을 기웃거리게 되었으니까.
“음식에 대한 예의는 저녁에 차리는 게 어떨까?”
은서는 얼른 줄리앙의 기억을 털어내며 태주의 손을 잡는다.
“좋아. 대신 샌드위치 카페로 가자.”
은서와 태주는 생트 포와 교회가 보이는 샌드위치 카페에 자리를 잡는다. 돌담을 따라 운치 있는 나무 테이블이 늘어선 노천 카페다. 은서는 치즈 샌드위치와 에비앙 생수를 태주는 닭고기 파니니와 콜라를 주문한다. 한적한 카페에 앉아 바라보는 콩크 거리는 또 다른 모습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은서의 눈이 옆 테이블에 앉은 단발머리 여자와 마주친다.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여자 일행을 쓰윽 훑어본다. 모두 튼튼한 등산화를 신었고, 테이블 옆에 커다란 배낭과 나무 지팡이가 놓여있다.
“저 사람들 순례 중인 것 같아.”
은서가 태주를 향해 소곤거린다.
“그러네. 성 야곱의 나무 지팡이와 큰 배낭…… 가이드북에 쓰인 그대로네.”
“콩크가 르 퓨이 순례길에 있는 마을이라더니, 순례자들이 제법 많아.”
“르 퓨이 순례길?”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알지?”
“알지. 그 순례자의 길을 걷겠다고 나선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잖아.”
“나도 한국 인터넷에서 본 것 같아. 어쨌든, 프랑스에서 출발해서 스페인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의 길은 4개가 있는데, 르 퓨이가 그중 하나야.”
“4개나 된다고?”
“그래. 파리에서 출발해서 투르를 거쳐 푸와티에를 지나 피레네를 넘어가는 투르 길이 첫 번째고, 베즐레에서 시작해서 클레르몽 페랑을 지나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가는 생 레오나르 길이 두 번째 순례길이야. 세 번째는 르 퓨이를 떠나 콩크를 거쳐 무와삭을 지나 피레네를 넘는 르 퓨이 길이고 마지막은 아를에서 출발해서 툴루즈를 거쳐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생질 길이 있지.”
“와, 프랑스 살면서 개종했니?”
감탄으로 가득한 태주의 질문에 하마터면 줄리앙 때문에 알게 됐어,라고 말할 뻔했다. 때마침 주문한 샌드위치가 나왔다. 은서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에비앙을 마신다. 줄리앙을 만나 사랑하고 살면서 태주를 지우지 못했던 것처럼, 태주와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순간에 자꾸 줄리앙을 떠올리는 자신이 한심하다.
“그런데 왜 저들은 순례를 떠나는 걸까?”
태주가 카페를 나가는 순례자들을 보며 묻는다.
“저마다 이유가 있겠지? 신께 용서를 구할 일이 있다거나 아니면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거나. 아니, 어쩌면 진정한 나를 만나고 싶어서 길을 떠나는 걸지도 몰라.”
“내 생각엔, 영원할 수 없는 삶의 슬픔을 넘어서려고 순례길을 걷는 것 같아. 아니면 내 마음이 그리워하는 것을 찾기 위해 서거나.”
태주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시인 같은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본다. 순례지에 오면 줄리앙의 표정도 저렇게 엄숙해졌다.
줄리앙은 순례자의 길을 걷는 대신 순례자들의 성지가 된 도시를 찾아다녔다. 신앙심은 깊었지만, 순례길을 걷기에 게을렀던 그는 그녀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성당에서 촛불을 밝히며 기도하고 고해성사까지 마친 뒤, 진지한 얼굴로 나타나곤 했다. 그래서일까. 줄리앙은 그녀를 질리게 할 정도로 거짓말을 못 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여자와 사랑에 빠졌던 순간에도 은서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던 줄리앙의 고백은, 서글픈 진실이었다.
카페를 나선 태주와 은서는 콩크 마을 돌담길을 따라 산책을 시작한다. 정갈한 돌집들이 늘어선 골목길로 들어서자 집집이 창문에 매달아 놓은 탐스러운 화분이 보인다. 집주인의 개성대로 심어 놓은 꽃 화분들이 투박한 돌집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미소를 보내온다. 정갈한 아름다움에 산책하는 발걸음이 즐거워진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마음이다.
골목길은 비탈진 언덕으로 이어진다. 언덕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올라서자 돌담으로 둘러싸인 집의 마당이 내려다보인다. 담장을 높이는 대신 정원을 소담스레 가꾼 집이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이 아기자기하다. 정원 한쪽에 심어진 크지도 작지도 않은 올리브나무와 우산 모양으로 손질한 향나무가 보인다. 담장을 따라 오종종 늘어선 꽃밭에는 형형색색 꽃들이 태양을 향해 고갯짓 하고 있다.
은서는 작은 연못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구스타브 쿠르베의 화집을 뒤적이는 자신을 상상해 본다. 어느새 그녀의 머리에는 희끗희끗 서리가 내렸고, 정원으로 나오는 태주의 손에는 에프터눈 티와 깔리송을 담은 원목 쟁반이 들려있다. 차를 마시는 그들 사이로 따스한 햇볕이 파고든다. 차를 마신 은서의 눈길이 화집으로 향한다. 넉넉하고 부드러운 태주의 손길이 그녀의 어깨로 다가선다. 막 뜨거워지기 시작한 태양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태주와 여행을 꿈꾸던 순간부터 그녀의 가슴에 조용히 자리 잡은 풍경. 힘든 40대를 보내며 50살이 되는 해에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는 소망을 안고 품었던 꿈이다. 프랑스에서 이방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던 그녀, 이제 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녀가 마지막 안식처로 태주를 선택하는 것이 이기적인 결정이 아니기를…… 은서는 조용히 마음으로 되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