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내의 그림자
어색한 침묵 속에서 은서와 태주가 아렌느 공원으로 들어선다. 기다렸다는 듯 오래된 도시의 냄새가 그들 사이로 스며든다. 태주가 습관처럼 입구에 놓인 공원 지도로 시선을 돌린다. 공원의 모든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요점정리를 해놓은 지도를 보며, 그는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구경할지 머릿속으로 메모한다.
그 사이, 은서는 퉁퉁거리는 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분수대로 향한다. 조각장식이 화려한 프랑스 분수들과 달리 심플하고 모던한 분수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며 천진하게 웃고 있다. 분수대로 가까이 가자, 수영복 차림으로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피라미드처럼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는 4층짜리 분수대를 무대로 아이들이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4층 분수대에서 솟구친 물이 3층 분수대로 흘러들고, 다시 그 물이 2층을 거쳐 1층 분수대로 쉼 없이 떨어지는 모습이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 같다. 햇살을 받은 물빛이 영롱한 에메랄드빛으로 빛난다. 분수대 주위를 둘러싼 녹음도 싱그럽다. 천진한 소녀처럼 분수를 바라보던 은서의 발길이 근처 벤치로 향한다.
“공원 구경은 안 할 거야?”
마지못해 은서를 따라 분수대로 온 태주가 잔뜩 볼멘소리로 묻는다. 벤치에 몸을 누인 은서가 새침한 얼굴로 그를 일별하고 돌아눕는다. 그러고는 또 침묵이다.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로 엄마의 자궁을 벗어나기 싫어하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다. 태주는 잔뜩 부풀었다 터져버린 풍선처럼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포기하듯 등을 돌린다.
더는 그녀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 이러다 깊숙한 곳에 감추어두었던 고약한 심술보가 터져 나와 한바탕 성질을 부릴 것 같다. 그러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떠야겠다. 은서에 대한 서운함으로 그의 발걸음이 무겁다. 터덜거리는 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힘없이 아렌느 공원을 걷는 그의 처진 어깨너머로 페리괴 갈로 로망 지구에 있는 아렌느 공원의 잔상들이 보인다.
태주의 마음처럼 공원 풍경이 스산하다. 그 옛날 화려했던 로마 시대의 영광은 흔적도 없다. 이곳이 3세기에 지은 원형 투기장이었다니, 환호와 열기로 넘쳐나던 로마의 유적이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거대한 돌무더기로 변한 투기장 곳곳에 피어난 꽃과 수풀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드러내고 있다.
나이 탓인지, 수시로 달라지는 그녀의 변덕을 감당하기 버겁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왜 갑자기 은서가 호텔에서 그를 밀어냈는지, 잔뜩 구겨진 우거지상으로 호텔을 나와서 얼음동굴처럼 차가운 침묵을 고집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여행이 피곤해진다. 어제부터 느껴지던 두 사람 사이의 묘한 삐걱거림. 떨어져 살았던 세월을 탓하기에는 여기저기 얽히고설킨 문제들이 산재했고 갈등의 골이 너무 깊다.
공원을 걷던 태주의 산책이 다시 분수 쪽으로 이어진다. 분수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도록 설계된 오솔길을 걸었나 보다. 분수 주변의 녹음이 짙게 우거졌다. 상록수 중간중간 심어놓은 야자수와 바나나 나무가 낭만적인 남국의 풍경을 자아낸다. 분수를 중심으로 빙 둘러 놓인 벤치에는 한가하게 오후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수영장 같은 분수대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엄마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지역 주민들,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키스를 나누는 젊은 커플들. 태주의 눈이 그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은서를 찾는다. 분수가 뿜어내는 시원한 물줄기 아래로 그녀의 나른한 등이 보인다. 햇살 샤워를 즐기는 그녀의 뒷모습이 여전히 완고해 보인다. 늘 그랬듯이 한 번 떼쓰기 시작하면 절대로 고집을 꺾지 않는 아이처럼 그녀가 옛 모습 그대로 앉아있다. 맞다. 은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한 건 태주다. 그녀를 가슴에 품었던 여리고 순수한 청년은 이제 고집불통에 이기적인 중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를 이렇게 변화시킨 건 아내였다. 아니 아내와 함께한 세월이었다.
처음 소개를 받은 날부터 아내는 보이지 않는 손처럼 그를 이끌었다. 어색하지 않게 이런저런 핑계와 이벤트를 만들어내며 두 사람의 만남을 자연스레 이어나갔다. 그러면서 아내는 계속 그에게 자신을 맞춰나갔다. 결혼하고 나서도 아내의 착함과 겸손은 계속되었다. 신혼부부들의 통과의례라는 주도권 싸움도 없었다. 사이비 교주를 따르듯 그를 지지하고 존중하는 아내 덕분에, 그는 자연스럽게 부전승으로 결승에 진출한 선수처럼 부부 사이의 패권을 차지했다. 연애 시절 토끼 같던 아내가 결혼하면 호랑이가 된다는 말도 틀렸다며 웃었다. 그렇게 그는 나날이 오만해져 갔다.
“나는 일하는 중에 쓸데없이 전화로 노닥거리는 거 싫어. 그러니까, 중요한 용건 없으면 근무 중에는 전화하지 마.”
신혼의 아내가 불쑥 보고 싶다며 살짝 달뜬 목소리로 전화했을 때도 그는 테러리스트보다 더 잔인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아내를 나무랐다. 대학원 연구실에서 전화 한 통 받는 일이 뭐 그리 힘들다고 어린 아내를 위협한 것이다. 미안하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은 아내는 그 뒤로 정말 중요한 용건이 있을 때만 전화했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였다. 대세에 지장만 없다면 무조건 그가 하자는 대로 그의 의견을 따랐다. 하다못해 외식을 싫어하는 그의 유별남도 묵묵하게 받아주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는 음식의 맛보다 위생이 더 중요해졌다. 아마 최고급 식당 주방을 급습해서, 더럽고 비위생적인 주방 상태를 고발한 TV 프로그램을 본 다음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식당 음식이 더럽다는 이유로 외식을 꺼렸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위해 매일 정갈한 밥상을 차렸다. 주말은 물론이고 퇴근 후, 아무리 힘들고 바빠도 아내는 직접 요리를 했다. 한식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쳤고, 치킨을 좋아하는 딸아이를 위해 직접 닭도 튀겼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도, 집안의 물건을 사는 일도, 모든 일의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전권을 휘두른 독재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스스로 존중받고 대우받는 가장이라는 느낌에 젖어 있었다. 남편 뜻을 거스르지 않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려고 노력한 아내 덕에 모든 것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를 이렇게 만든 건 아내였다.
‘나, 정말 못났다.’
태주는 마음속에 쌓인 찌꺼기를 뱉어내듯 길게 한숨을 쉬며 분수대와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내와 은서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못난 마음처럼 그의 걸음이 흔들린다. 고백하자면 이번 여행의 저변에는 아내에게 복수하겠다는 치졸한 발상이 있었다. 아무리 우울증이 깊어졌다지만 1년 동안이나 그를 무시하고 연락조차 없는 아내가 미워서 은서의 제안을 덥석 물고 여행을 떠나온 것이다. 아아, 모르겠다. 아내 몰래 여행을 떠났던 어제 아침에 그는 짜릿한 행복에 들떠 있었다. 은서와 보낸 어젯밤도 황홀했다. 이대로 아내를 잊고 그녀와의 미래를 그려볼까, 하는 감미로운 유혹에 젖기도 했다. 그런데 이 무슨 변덕이란 말인가. 지금 그의 마음은 아내를 불러내어 또 다른 갈등에 휩싸여있다. 수습할 수 없는 감정의 밀물이 그를 덮친 느낌이다. 총체적인 난국이다.
“미안합니다.”
생각에 빠져 걷느라 마주 오던 사람과 거의 부딪칠 뻔했다. 잘못한 건 태주였는데, 인사성 바른 프랑스인이 습관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태주도 허둥거리며 사과의 말을 건넬 때였다. 익숙한 무언가가 그의 옆을 휙, 바람처럼 스치며 지나간다. 절벽 끝에 놓인 바위가 굴러 떨어지듯 태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보통 키에 균형 잡힌 몸매, 웨이브 진 단발 커트 머리. 발레리나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사뿐사뿐 팔자걸음을 걷는 저 여자는…… 분명 아내, 선영이다.
헉, 선영이라니 말도 안 된다.
그럴 리 없다. 아내는 지금 서울에 있다. 저 여자가 선영일 리 없다. 태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홀린 듯 앞서가는 여자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타박타박 여자의 발걸음이 기이하게 가벼워 보인다. 행여 놓칠세라 여자의 뒤를 따르던 태주의 머릿속이 푸른 안개로 가득해진다. 저 여자가 아내 일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점점 짙어진다. 아내라면 충분히 이런 일을 벌이고도 남을 여자다. 흥, 우울증을 핑계로 무관심한 척했어도, 아내의 안테나는 그를 향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의 일탈을 알아낸 아내가 그를 미행하고,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것 같다. 여자를 따라가는 태주의 걸음이 빨라진다. 어서 아내를 확인해야 한다. 한바탕 떠들썩한 싸움을 벌이더라도 아내와 마주하고 싶다. 얌전한 고양이처럼 다소곳이 있다가 훅 들어와 그를 흠칫 놀라게 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치사하고 옹졸한 방법으로 그를 곤경으로 몰아넣고, 벌하려는 아내가 정말 밉다. 더럽게 뻔뻔하고 야비한 아내가 미워 죽겠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싶다.
이상하다. 아내를 향한 원망과 미움 대신 그의 가슴에 그리움이 차오른다. 그를 외면했던 아내가 미워서, 아내한테서 멀어지고 벗어나려고 했는데, 속도를 높이며 다가온 아내의 기억이 그를 추월하고 말았다. 은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내와의 추억 탓일지 모른다는 징글징글한 진실이 그의 가슴을 파고든다. 아내를 따라잡으려고 허둥거리는 그의 발걸음이 휘청거린다. 아아, 아내의 걸음이 너무 빨라 따라잡기가 힘들다.
선영아, 수정이 엄마. 태주는 뛰다시피 여자를 따라가며 아내를 부른다.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살랑살랑 발걸음 가볍게 걷는 아내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태주의 타는 가슴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분사분 아내는 공원 서쪽,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계속 걸어간다. 꼿꼿한 아내의 등이 서글퍼 보인다. 그 모습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며 눈앞이 흐려진다. 꽉 쥔 주먹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려는데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어이, 여기 누구 허락받고 온 거야?”
어깨가 건장한 남자가 건들거리며 태주에게 시비를 건다. 태주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껄렁패 청년들 몇몇이 다가온다. 무슬림 얼굴을 한 불량 청소년들이다. 아내가 점점 멀어진다. 이러고 지체할 시간이 없다. 마음이 급해진 태주가 그들을 무시하고 가려는데, 청년 하나가 그를 잡아 세운다.
“이러지 마요. 저, 빨리 가야 합니다.”
익숙하지 못한 태주의 프랑스어가 사르르 떨린다. 그사이 아내의 걸음이 더 빨라지는가 싶더니 돌탑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여보, 수정이 엄마. 까맣게 타들어가는 마음과 달리 청소년들에게 둘러싸인 태주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 아내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입술이 달싹여지지 않는다. 청년 하나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바지 주머니로 손을 뻗는다. 지갑을 노리는 것이 틀림없다. 이깟 지갑, 어서 던져버리고 아내를 찾아 나서야 한다. 태주가 급한 손놀림으로 지갑을 꺼낼 때였다.
“이놈들, 여기서 뭐 하는 짓거리야?”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제복을 입은 남자가 뛰어온다. 당황한 껄렁패들이 태주를 확 밀쳐내더니 냅다 뛰기 시작한다. 놈들에게 밀려 바닥으로 고꾸라졌던 태주도 후다닥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어서 아내를 따라가야 한다. 그는 있는 힘껏 아내가 사라진 돌탑을 향해 달린다.
모퉁이를 돌자 막다른 길이 그를 막아선다. 삐죽삐죽 어수선하게 자란 나무들과 들꽃들이 어우러진 작은 공터뿐이다. 그곳에 아내는 없다. 분명 아내가 돌탑 모퉁이를 돌아 이리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느 곳에도 아내가 없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숨을 곳도 빠져나갈 곳도 없는 곳에서 대체 아내는 어디로 간 것일까. 태주의 등에 아찔한 소름이 돋는다. 허탈한 걸음으로 아내가 사라진 곳을 찾아 이리저리 서성이는데, 찌리릿 기분 나쁜 통증이 머리를 짓누른다. 가슴에 시한폭탄을 장착한 듯 초조한 긴장감이 몰려온다. 통증이 점점 심해진다. 잔인한 살인마처럼 누군가가 예리한 칼로 뇌를 난도질하는 것 같다. 서, 선영아.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 쥔 태주가 신음처럼 아내를 부르며 쓰러진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선뜻한 바람을 느끼며 태주가 번쩍 눈을 뜬다.
여기가 어디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리기까지 찰나의 시간이 영원처럼 흐른다. 머리가 멍해져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끔벅끔벅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코끝으로 은은한 꽃향기가 스친다. 몸을 조금씩 움직여 본다. 손과 발,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아프지 않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나 보다. 태주는 차근차근 자신을 더듬어 본다. 그의 머릿속으로 번개 치듯 영상 하나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분수대 벤치에 누워 해바라기를 하던 은서의 완고한 등.
이런, 은서를 잊고 있었다. 낭패다. 지금 그는 은서와 여행 중이고, 아내는 이곳에 없다는 현실이 또렷하게 몸을 드러낸다. 아내의 환영을 본 것이 틀림없다. 아내 몰래 여행을 왔다는 자책감이 만들어낸 환영. 태주는 입술을 깨물며 질끈 눈을 감는다. 가만가만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단전에 힘을 모으며 복식호흡을 한다. 그를 옥죄는 아내의 기억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내의 몹쓸 환상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어서 은서에게 가야 한다. 태주는 온몸을 결박하던 무력감을 털어내며 벌떡 몸을 일으킨다. 흙투성이인 채로 허겁지겁 은서가 앉았던 분수대 벤치를 향해 뛰기 시작한다.
“은서야. 은서야.”
그녀가 햇살 아래 누웠던 벤치가 텅 비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분수 주위를 돌며 그녀를 찾았으나 아무 데도 없다. 급한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근처 오솔길까지 뒤졌으나 찾을 길 없다. 태주의 가슴이 불규칙하게 덜컹거린다.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긴 숨을 몰아쉰다. 언제부터인가,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가슴에서 쇳내가 올라오고,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무서운 통증이 몰려온다. 길고 깊은 심호흡을 하며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본다. 여전히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불안한 가슴을 억누르며 태주는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