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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May 29. 2016

베란다에서 이불을 널 때

"단순 거주나 소유, 재산 증식의 가치만이 있는 집,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해주는 매개체로서의 집, 과시나 자랑의 수단이 되어버린 집, 물리적 가옥만 있을 뿐 가정이나 가풍, 주거 문화가 전혀 없는 집, 이제 아파트는 더이상 집이 되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지금 집 없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서윤영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 중


늦은 밤 세탁기를 돌린다. 세탁 종료 소리에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었다. 다 된 빨래를 들고 베란다로 가서 건조대를 펼쳐 넌다. 속옷과 양말, 아이옷이 대부분이다. 베란다 너머 아파트 앞동은 대부분 불이 꺼졌다. 달ㅇ리 중천에 떠있고 별이 환한 밤이다. 밤에 빨래를 하고 널 때, 나는 문득 고향집 일요일 풍경을 떠올린다. 


볕이 좋은 일요일 아침, 장독대 옆 수돗가에서 엄마와 누나가 빨래를 한다. 큰 다라이에는 바지와 티셔츠를, 세숫대야에는 무채색 양말과 속옷이 있다. 누나가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다라이로 들어간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빨래를 밟는다. 밟을수록 땟물이 빠져나와 물이 회색으로 바뀐다. 엄마는 속옷과 양말에 방망이질을 한다. 가차없이 쏟아지는 방망이 세래에 세균이고 곰팡이고 다 사망이다. 투명한 물에 행군 후 물을 짜낸다. 그리고, 하늘을 가르며 늘어진 빨래줄에 빨래를 넌다. 그날 오후 다 마른 빨래를 걷어서 개어 놓는다. 


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는 며칠을 그곳에 머문다. 다음날 비가와서 빨래는 마르지 않았고 그 다음날을 아내에게 미루느라 빨래를 걷지 않았다. 주말에 되어 다시 빨래를 하느라 겨우 걷었다. 빨래는 이미 먼지 범벅이 되버렸지만 모른 척, 옷장으로 쳐 넣었다. 밤에 빨래를 하고, 며칠을 널어두어 미세먼지 그득한 옷. 난 아파트에서 그렇게 살고 있다. 


가풍이나 주거문화가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건 사람이 만드는 일이라서, 사람에 따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없다고 해서 진짜 없는 건 아니다. 그 집 나름의 생활패턴이 어느 집이든 있기 마련이다. 세련되었는지 여부는 다른 집에서 판단할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아침에 해가 뜨고 밤에 달이 뜨는 자연의 흐름은 누구나 공유한다. 이 법칙을 거스르는 건 어리석고 게으르다. 어느 집이든 저녁 서리 내리기 전 빨래를 걷어들였다. 


해가 뜰 때 일어나서 빨래를 하고, 해가 그 빨래를 말리는 동안 일을 하다가, 저녁 서리가 내리기 전 빨래를 걷어 집안으로 다시 넣는 일. 이건 가풍도 문화도 아닌 자연흐름 그 자체다. 아파트에서 생활은 해가 뜨든 달이 뜨는 빨래를 할 수 있고, 비가 오든 눈이오든 빨래를 널 수 있다. 난 이 사태를 자유로 이해하지 않는다. 난 이 자유로움이 구속처럼 느껴진다. 낮과 밤이 생활의 중심이 되어주면 좋겠다. 그래야 갈피 잃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날이 흐리다. 미세먼지가 많은지 앞산이 보이지 않을만큼 뿌옇다. 아내는 창문을 열지 말라는 지침을 내리고 외출하셨다. 미세먼지를 마시는 건 자동차 배기구에 코를 박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까지 더했다. 1평도 안되는 베란다에서 이불을 널려고 하니, 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하루 3시간 해드는 아파트에서 이불은 최소 이틀은 말려야하고 그 시간동안 밤도 낮도 없이 나는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퍼진다. 지난 밤, 자정이 넘도록 불이 켜진 아파트에서 그 누군가는 청소를 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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