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대림창고>
오래된 것들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난 그 이야기를 즐겨 듣는 시간이 반갑다. 예전에 난 새로운 건물과 처음 만나는 풍경을 동경했었다. ( 물론 지금도 새로운 공간을 설계할 때, 설렌다) '새롭다는'말은 세련되었다는 말과 통했고, 남과는 다르다는 걸 암시했다. 나의 기질과 성향이 오롯 드러나는 건축, 남과 다른 풍경을 디자인한다는 사실이 내 존재를 승인하는 듯 했다. 다르다. 아찔한 단어다. 다름은 새로운 걸 의미했고, 다름은 내가 사는 시대의 세련된 가치였다.
하지만 초저녁잠이 늘고 새벽 일찍 눈이 떠지기 시작할 무렵, 난 지난 세월이 그리워졌다. 그때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었다. 바쁘게 사느라, 아니 남과 다르게 사(는 척)느라 지나쳤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어졌다. 나이 때문인지건지, 이 또한 시대를 관통하는 트랜드인지 지금으로썬 알 수 없다. 다만, 난 오래된 것들이 좋아졌다. 내 아이가 나만큼 컸을 때, 내가 건너온 시간을 말해주고 싶다. 이 시간의 질감을 느끼고 전해주고 싶다.
여러 기획의 기착지는 공간인 듯하다. 공간을 기획할 때는 다양한 장르를 포섭해야 한다. 행화탕 프로젝트를 해나가면서 여러 기획자들을 만났다. 그림을 다루는 분, 음악을 평론하는 분, 공연과 축제를 만드는 분들까지 내 평생 이런 장르에서 일한는 분들은 처음이었다. 그분들과 모여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늘 '공간'에 대한 말을 꺼냈다. '행화탕'이라는 공간을 기반으로 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다양한 장르를 묶어주는 공간이 바로 '공간'이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우린 모두 공간기획자일지도 모른다.
공간은 비어있는 캔버스, 음표없는 오선지다. 공간에 깊이와 질감을 불어넣는 건 사람의 움직임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 차를 마시는 사람, 수다를 떨고 책을 읽는 사람. 사람들이 공간의 성격을 만들어준다. 공간과 사람이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장면은 벅찬 감동이다.
대림창고는 이제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 명사에 주름잡힌 의미는 이미 창고를 탈주했다. 대림창고는 패션쇼무대였고, 공연장이었으며 파티장이고 콘퍼런스 홀이었다. 어제 대림창고를 다시 찾았다. 창고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던 공간에 그림과 차, 음식이 더해졌다. 대림창고는 무엇도 아닌 공간이 되었고, 다만 사람이 거닐고 머무는 장소가 되어있었다.
음악과 그림과 대화와 독서를 받아치려면 공간도 힘이 있어야 한다. 세기와 관록을 지녀야 받아칠 건 받아치고, 넘길 건 넘기며 수용할 건 수용한다. 사람과 공간이 리드미컬하게 서로의 존재를 주고받아야 빅뱅이 발생한다. 새 건물은 세기와 관록이 부족하다. 젊은 건축은 아찔하지만 불안하고 쌈빡하지만 깊은맛이 부족하다. 둘 모두를 가질 수는 없다. 젊은 건축은 그 나름의 계통위에서 번성한다. 내 마음이 젊음을 더 이상 쫓지 않는 걸 보니, 아, 나이 들었나보다.
시간은 다만 쌓일 뿐 질료를 조합해 창출해내는 물질이 아니다. 그래서 시간은 기다려야 하고 버텨야 얻을 수 있다. 오래된 건물은 단지 시간을 견뎠다는 이유만으로도 엄숙하다. 누적된 시간으로 원숙해진 공간, 산전수전 다 겪은 공간이 아니었다면 대림창고는 잡탕이 되었을 것이다. 웅성거리지만 안온하고 밝되 차분한 공간.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말과 손짓과 몸짓이 뒤엉켜 있음에도 정돈된 느낌. 공간의 아우라가 전반적인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공간기획은 공간(문화)기획이다. 공간기획을 공간(상업)기획으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마스다 무네아키의 <지적자본론>을 읽고 라이프스타일을 판매하는 행위가 어떻게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는지 따져보았다. 따졌지만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얼개만 잡힐 뿐 채색을 할 수는 없었다. 공간을 기획한다는 것 까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어느 정도로 해야할지는 감이 안 왔다. 상업적 목표를 크게 의식하고 있어서였던 건 아닐까, 대림창고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공간기획의 핵심은 문화다.
대림창고의 거대한 목재출입문 앞에 한 남자가 있었다. 오른손으로 문을 잡아주면서 들어오라고 말을 건넸다. 출입문 앞에는 SUV차량 크기의 설치작품이 놓여있었는데 그가 손님들에게 작품을 설명했다. 작가 100여명의 풀이 있는데, 그들의 작품을 이곳에 전시할 예정이라고 했다. 설명을 듣던 관람객이자 손님이 참 잘한 일이라며 반겼다. 거듭 칭찬을 했다. 난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예술은 다툼을 중재하는 사회요소다. 예술이 번성할 때 빈부격차도 사라지고 아동폭력과 자살도 줄어드는 건 아닐까.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기에 선한 본성을 자극하고, 선하게 살도록 돕는 도구나 방법은 그것 자체로 존재를 승인받는다. 예술 자체는 쓸모가 없지만, 그렇기에 사람들은 예술을 지지하고 옹호한다. 우린 모두 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공간기획의 핵심은 문화이고, 문화의 중추는 예술이구나 싶었다.
대림창고를 찾은 건 행화탕프로젝트의 방향을 재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았다. 행화탕에서 우리가 하려는 일은 대림창고에 비해 조금 더 공적이고 지역중심이다. 그렇지만 예술이 중심을 이루고 공간을 기반으로 사업을 전개한다는 구조는 같다. 오래된 건물의 힘을 활용해 공간을 넘어 장소를 지향하는 것까지 비슷하다. 한시적이지만, 그 시간 동안이라도 시스템적인 도전을 해보고 싶다. 공간과 예술이 만나 사람을 불러모으고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시스템, 경험, 노하우를 쌓고 싶다.
그림을 볼 때, 자기 삶과 맥락이 닿지 않으면 감흥이 약하다. 별을 보고 그리운 사람을 떠올릴 때, 그 별은 별이 아닌 그 사람이 되고, 작품이 된다. 자기 삶과 닿아야 한다. 공간도 그렇다. 이야기가 많은 공간은 많은 사람에게 말을 걸고, 깊고 넓게 사람의 마음을 흡수한다. 오래된 공간은 새 건물에는 없는 감응의 지점이 많다. 오래된 공간에서 발견하는 나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주기에 오래된 건물이 다시 주목받는 건 아닐까. 어렸을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목욕탕 오가던 일이 떠오른다던 한 관람자의 후기가 기억난다.
* 아래 글은 쓰다 만 소개글.
한국전쟁후 서울은 급속히 팽창했다. 사대문안 지역은 주거지에서 상업공간으로 바뀌었고, 주변 논밭은 옷, 신발, 생활용품등을 생산하는 도심 배후 경공업지역으로 성장했다. 성수동은 인쇄와 자동차부품 공장이 즐비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인쇄산업은 파주로 빠져나가고 자동차부품은 산업 고도화로 침체를 겪으며 성수동은 공동화의 위기에 빠진다.
염천교 일대는 수제화를 만들던 공장이 밀집해있는 지역이다. 한국전쟁후 미군 전투화를 자르고 붙여 구두를 만들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숭례문이 내다보일 정도로 대형상권(남대문시장, 명동)과 가깝고 서울역 근처라 지방 유통에도 큰 이점이 있었다. 땅값이 상승했고, 이를 감당하지 못한 영세 수제화업체들이 다른 곳으로 이전해갔다. 도심 배후지의 경공업지역중 하나인 성수동이다. 국내 최대 제화업체인 금강제화 본점이 성수동에 있는 이유다.
근대건축은 철과 함께 발달한다. 철도역사와 공장은 근대에 출현한 건물유형인데, 강철을 이용해 대형공간으로 만들어졌다. 기둥이 없는 공간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다. 층고까지 높다면 많이 사람이 한꺼번에 모이는 행사나 전시도 가능하다. 갤러리와 공장의 공간프로그램은 이런 특성을 공유한다. 두 공간 모두 높고 넓으며 기동이 없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비워져있던 물류창고를 공연장이나 갤러리로 바꾼 것은 공간의 유형에 따르는 영리한 공간활용의 예이다. 대림창고는 성수동에 있던 제지 물류창고였다. 가죽신발을 아무리 많이 만든다 한들 이정도 규모의 창고까지는 필요없다. 신발공장이 러시를 이루며 성수동을 채워도 이 창고는 비워져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그 덕에 2010년 이후 전시나 공연장으로 쓰였고, 지금은 갤러리형까페+레스토랑으로 새로 문을 열었다.(정식오픈은 한 달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