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발견하는걸까, 생산하는걸까
갑자기 시간이 빈다. 뭘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근처 까페로 무작정 들어갔다. 시원한 아메리카노와 빵을 주문해서 마시고 먹는다. 멍 때리다가 뭐라도 해야할 것같아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글을 쓴다.
오늘 내가 쓰고 싶은 글의 주제는 '자의식'이다. 난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을 하는 나 자신을 강하게 의식한다. 예를 들어, 농구를 하면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제스처를 취한다. 심지어 그렇게 타인을 의식하고 있는 나 자신을 의식한다. 운동 뿐만 아니다. 글을 쓸 때 자의식 과잉은 최고조에 이른다.
어떤 낱말을 쓰는지, 문장을 어떻게 구사하는 지 나는 매 순간 내 손가락 끝을 의식한다. 그 순간마다 나는 내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어진다. 왜 이딴식으로 밖에 못쓰는지 한심하기 이를데없다. 글 쓰는 자신을 강하게 의식하다보니 하고 싶은 말보다 '글' 자체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러니 내용은 없고 껍데기만 요란한 글이 나온다. 그렇게 쓰고 있다는 걸, 그걸 의식한다. 그게 문제다.
이런 내 성향을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하는지 최근에 알았다. '자의식 과잉'이다. 심리학 용어다. <미움받을 용기>를 읽으며 알게 됐다. 난 '자의식 과잉'인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다. 즉, 타인의 존재를 필요이상으로 의식하고, 그렇게 의식한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 자각하는 상태다. 자연히 내 본연의 모습 보다는 타인에게 비춰진 내모습을 신경쓰게 되고, 내 천성과 기질보다는 타인에게 맞춤된 성향으로 나 자신을 디자인한다. 잘보이고 싶고, 그럴듯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말이다.
<미움받을 용기>는 심리학자 '아들러'의 이론을 쉬운말로 풀어놓은 책이다. 책은 왜 내가 '자의식 과잉'에 빠지는지 단순명료하게 지적한다. 그 역시 아들러의 이론이다. 바로 '과제의 분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보든 그건 그 사람의 과제이다. 나는 내 감정과 생각만 알거나 느낄 수 있고, 혹은 통제하거나 표출할 수 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어도, 타인의 감정과 생각은 그 사람의 것이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진 모르나,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으로 나는 타인의 과제를 내가 대신 수행할 수 없다.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나는 결코 알 수 없다. 따라서 나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불가능하고, 오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내 감정과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 즉, 나는 '나의 과제'를 수행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남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의식하는 것. 그렇게 의식하는 나를 의식하는 것. 결국 나를 놓고 타인에게 나를 맞춰려는 시도이지 않을까. 나는 혼자지만 타인은 무한대다. 어차피 불가능하다. 타인에게 나를 맞출수는 없다. 나는 내 일에 집중하면 된다. 글쓰기로 치면,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집중하면 그만이다.
글을 길게 쓰든 짧게 쓰든, 문장이 그지같든 명문이든 크게 신경쓸 필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그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 이야기를 타인이 어떻게 읽고 받아들일지는 나로써는 알 수 없는 그들의 과제이다. 나는 내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