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지만 괜히 여행 책을 꺼내 들고 책장을 넘기다 보면, 마치 이미 그곳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순간 말이다. 나도 가끔 『론리 플래닛』이나 『100배 즐기기』 같은 여행 책을 꺼내 읽기만 할 때가 있다. 실제로 당장 떠날 계획은 없더라도,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마음은 어느새 공항 출국장이나 외곽의 버스 정류장에 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대표적인 여행지 중 하나는 동남아시아다. 거리도 비교적 가까워서 직장인들에게 특히 매력적이다. 대체로 저녁 늦게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면, 돌아올 때는 현지에서 밤 늦게 출발해 한국에 새벽에 도착할 수 있으니 시간을 알뜰하게 쓸 수 있다. 게다가 날씨도 좋다. 추위보다 더운 날씨가 여행지로는 더 매력적이다. 겨울에 따뜻한 나라로 떠나는 기분, 상상만 해도 좋지 않은가?
푸켓, 나짱, 코타키나발루, 발리처럼 바다를 낀 도시들은 아름답고 볼거리도 많다. 길거리 음식으로 한 끼를 1,500원에 해결할 수도 있고, 원한다면 고급 호텔에서 호화로운 만찬을 즐길 수도 있다. 가진 만큼 쓰면 되는 곳. 주머니가 가볍든, 여유가 있든 모두를 환영하는 여행지다. 그래서일까. 이곳들은 언제 가도 편하고, 잘 쉬다 온 느낌이 든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곳은 필리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리핀 하면 세부, 보라카이 같은 해변과 고급 리조트를 먼저 떠올린다. 육지 여행을 떠올리는 경우는 드물다. 수도 마닐라를 하루쯤 들르거나, 심지어 그마저도 치안 문제 때문에 반나절만 머무르곤 한다. 실제로 국내에서 출간된 필리핀 여행 책자들을 보면, 수도 외의 내륙 지역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 이전에는 통일된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고, 여러 소규모 부족이 흩어져 살아가던 지역이었다.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에서나 가능한 대규모 공공 건설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유적지가 거의 없다. 게다가 스페인의 식민 지배 방식은 일정 부분 자치를 허용했던 영국과 달리, 철저한 수탈형 구조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거대한 유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필리핀에는 역사나 유적지가 없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2013년, 나는 수도에서 두 시간 떨어진 클락이라는 도시에서 두 달 동안 어학연수를 한 적이 있다. 필리핀은 미국 식민지 시절을 거치면서 영어가 공용어가 되었고, 지금은 저렴한 어학연수지로 인기가 높다. 그때 학원에서 알게 된 한 일본인 친구가 ‘바다보다 육지를 좋아한다면 여기 한번 가보라’며 추천한 도시가 있었다. 이름은 비간(Vigan). 필리핀에 그런 도시가 있었나?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됐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내 호기심을 자극했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정말이였다. 나는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다.
비간은 필리핀 북부 루손섬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면적은 서울의 구 한 개 정도, 25㎢ 남짓이다. 작지만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다. 16세기말 스페인 식민지 시절, 이곳은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도시였다. 이후 내전이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여기는 그 피해에서 벗어난 덕분에 유럽풍의 거리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고, 지금도 그 시절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지도만 본다면 클락에서 비간까지는 4시간 정도로 가깝게 보인다. 그러나 동남아의 많은 지역이 그렇듯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중간중간 산을 넘고 시골길을 따라가야하므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100km 거리는 한국에서 부산-대구으로 차로 1시간이면 도착하지만 이곳에서는 2배는 생각해야 한다. 밤 늦게 출발한 버스는 약 8시간쯤 달려 이른 새벽 목적지에 도착했다. 버스는 중간쯤 휴게실에 들른다. 한국처럼 깨끗하게 정돈되고 먹을 거리가 많은 그런 곳을 생각하면 안 된다. 푸세식과 현대식의 절반으로 보이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근처 구멍가게에서 컵라면, 빵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해결한다. 버스 안에서 쪽잠을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 아마도 새벽 6시쯤이였나? 도시 전체는 조용했고 아직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고요함 속에서 스페인풍 건물들 위로 막 떠오르는 햇빛이 보였다. 햇살은 붉은 벽돌 건물에 번지면서, 마치 시간 여행을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직 호텔에 체크인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배낭을 매고 여기저기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곳은 마차 투어로 유명한 곳이다. 과거 스페인 식민지 때 귀족들이 타던 마차를 지금은 관광객들이 타고 다닌다.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돌길 위를 또각또각 달리다 보면 마치 중세 스페인 귀족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요금은 시에서 정한 정액만 주면 되었기 때문에 바가지를 당할 염려도 없다. 평소 짠돌이 여행자라면 둘째가라도 서러울 정도였지만 여기서 마차 금액은 비싸지 않아 나도 한번 타봤다. 또각또각 말 발굽 소리가 울리는 좁은 골목길, 낮게 깔린 기와지붕, 낡았지만 정감 있는 간판들까지.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포토존이다.
비간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기의 주요 건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비간 대성당, 주교관, 산파울로 대학교, 시청, 그리고 거리 곳곳의 고택들까지. 대부분은 지금 박물관이나 민속 전시관으로 바뀌어 있지만, 그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어떤 집은 숙소로 운영되기도 하고, 실제로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도 있다. 어느 작은 갤러리에서는 19세기 귀족 가문의 집 내부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세월의 먼지가 얹힌 듯한 찻잔과 흔들의자, 그리고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들이 보였다.
사실 비간은 도시 자체가 크지 않아서, 주요 명소를 부지런히 둘러보면 두세시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런 식의 여행은 이 도시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비간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보다 천천히 머물러야 제맛이다. 주말임에도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서 고즈넉하게 다닐 수 있다. 수많은 골목길 중 하나를 지나서 걷다보니 관광지가 아닌, 동네 사람들이 사는 곳이 나오며 그곳은 조금 전에 스쳤던 장소들과 전혀 반대의 느낌이다. 나는 현지인들 틈에 끼여 1500원으로 한끼를 해결하고 다시 꼬불꼬불한 길을 거쳐 중세시대로 돌아왔다. 불과 수백미터 사이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다.
비간은 필리핀의 ‘숨은 얼굴’ 같은 곳이다. 사람들은 흔히 필리핀을 휴양지, 바다, 리조트로 기억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또 다른 모습이 있다. 비간을 여행하면서 필리핀이라는 나라를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가 필리핀을 너무 좁은 틀 안에서만 바라본 것이 아닐까 싶다. 바다가 전부가 아니며, 쇼핑이 전부가 아니였다. 여기에도 역사가 있고 유적지가 있다. 비간은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봐, 우리에게도 이런 도시가 있어.”라고
만약 당신이 지금 필리핀에 살고 있다면, 또는 필리핀에서 다음 여행지를 고민 중이라면, 비간을 추천하고 싶다. 익숙한 리조트 대신 낯선 거리, 화려한 쇼핑몰 대신 낡은 벽돌길에서 걷는 경험은, 분명 당신의 여행을 더 깊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더 밝은 미소로 당신을 반겨줄 것이다.
- 2020.12.14.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