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혹은 실체와 거리가 있는 상상 또는 생각과 감정을 “오해”라고 한다면.
심지어 자아(데카르트적 cogito)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도 오해로 구성되고, 직조된다. 그 사람에 대해서 오해했기 때문에,친구가 되었고 연인/부부가 되었고, 또 원수가 되었다. 필연과 천륜과 같이 당위적인(혹인 필연적인) 관계 또한 구성적 상상 기반으로 유지된다. 내가 알던 다른 가족의 모습, 그리고 기대하는 모습은 그 사람의 실체와 거리가 멀다.
우리는 오해했기 때문에 사랑했고, 목숨을 바쳤고, 치열하게 미워했다는 면에서 이러한 상상적이면서 상징적인 부분이 삶의 본질에 가깝다.
그리고 미끄러지는 시니피앙으로 기인하는 소쉬르적 원죄로 인해 우리는 진실을 마주할 수 없다. ‘오해’를 풀기 위해 소통을 해야한다는 말은 거짓에 가깝다. 불편한 오해를, 조금 더 마음이 편한 방식의 오해로 바꿀 뿐이다. 풀 수 없을 뿐더러, 밀어내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
스토익적인 문장으로 환언하면, 타인의 상상과 상징으로 감정이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타인 마음과 머리 안에 구성된 상상은 바꿀 수 없고, 바꾼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꿀 뿐이며, 그것은 진실과 늘 거리가 멀다.
피카르트적 침묵만이, 부정신학적인 침묵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 중에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