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라는 이름의 비어 있음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신념의 뿌리를 이룬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할 때, 말은 부풀어 오른다. 의미는 과잉되고, 해석은 이내 억압으로 변한다. 진리는 드러나야 하지만, 완전히 드러날 수는 없기에, 우리는 언제나 어떤 텅 빈 구조물을 필요로 한다. 교리란 바로 그 빈자리를 가리키기 위한 불완전한 도식이며, 말과 침묵이 맞물려 만들어낸 공동의 형식이다.
신학은 고요한 절벽을 응시하는 일이다. 그 벼랑 끝에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사건을 명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명명은 언제나 뒤늦고 불완전하다. 그래서 어떤 문장은 종종 영원보다 무겁다. 교리란 이처럼 의미의 결박이 아니라, 의미가 공백을 중심으로 배치되는 방식이다. 그것은 진리를 증명하는 공식이 아니라, 진리를 불러내는 장(field)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해석으로 충분한데 왜 체계를 세우는가. 성서 자체가 열림이며 드러남인데, 굳이 그 위에 무엇을 얹어야 하는가. 그러나 해석은 언제나 벽에 부딪힌다. 말의 바다는 너무 깊고 넓어, 그 항해에는 구조물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구조물이 닻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착이 아니라, 방향을 상기시키는 표류의 틀이어야 한다.
문제는 이 틀이 너무 자주 체제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는 점이다. 교리는 그 자체로 닫힌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고정된 해석으로 오인될 때, 삶은 방향을 잃는다. 교리는 삶을 해명해야 하는데, 오히려 삶을 가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리가 아니라 기표의 잔해에 불과하다. 어떤 교리는 믿음을 지지하기보다는, 권위를 지탱하는 구조물로 작동한다. 진리는 사라지고, 텅 빈 명제들만이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구조를 폐기할 수 있을까. 언어가 없으면 세계를 감각할 수 없듯이, 텅 빈 형식 없이는 삶의 지도를 펼 수 없다. 이 구조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해 비워져야 하는 것이다. 교리는 완성이 아니라 비워내기를 위한 구조, 해석이 작동할 수 있는 여백이어야 한다. 믿음을 틀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이 틀을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교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아니다. 교리는 지연된 진리, 이루어지지 않은 응답, 채워지지 않는 중심을 가리킨다. 그것은 삶을 멈추게 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만든다. 이 구조는 모든 말이 닿을 수 없는 것을 겨냥하고, 모든 말이 실패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어떤 윤곽을 그린다.
교리는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아니, 끝없이 다시 비워져야 한다.
교리는 무게가 아니라, 공기의 압력처럼 존재하는 윤리다.
그것은 결코 말해지지 않으면서, 끝내 말을 요청하는 공백의 명령이다.
완성된 언어가 아니라, 언제나 실패하는 언어의 방식.
닫힌 진리가 아니라, 무한히 비워지는 진리의 형태.
형식이 아니라, 사건을 가능케 하는 침묵의 구조.
믿음의 최종 해설이 아니라, 해석의 문턱에서 삶을 다시 묻는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