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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에서도 나는 나, <역대급 영지 설계사>

이현민 글/김현수 그림/문백경 원작, 네이버웹툰(2021~)

by Woo Play
현생에서 실패한 주인공이 이세계(異世界)에서 성공하는 스토리는 이 장르의 공식과도 같다. 이세계물이 인기를 끄는 이유인 동시에, 현실도피적 망상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대급 영지 설계사>의 로이드를 보면 이것을 현실도피적 망상이라고 함부로 폄하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고? 로이드, 아니 김수호는 현실에서 도망친 적이 없으니까.


* 원작 소설이 아닌 네이버웹툰을 보고 썼습니다.

* 아주 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안 보신 분들의 감상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진짜 나의 세계는 어디인가?

출근길에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 사실은 매일 이세계(異世界)를 오가고 있는 게 아닐까?'


아침이면 회사라는 이세계로 출근했다가, 저녁에는 집이라는 나의 세계로 돌아오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그 반대인가? 회사가 나의 원래 세계이고, 집이 이세계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나의 본업은 회사원이고, 평일에는 가족 얼굴을 저녁 때나 잠깐 보고 회사 사람들 얼굴을 더 많이 보니까. 무엇보다 월급을 주는 회사야 말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현실 아닌가.


반면 집은 어떤가? 회사의 노예인 내가 집에 오면 맛있는 것도 먹고, 만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가족들과 대화라는 것도 할 수 있다. 놀랍다! 내가 그런 것도 할 수 있다니. 역시 회사가 현실이고 집이 판타지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매일 다른 세계를 오가며 살고 있는 걸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거다. 집과 회사는 환경도, 사람도, 하는 일도, 규칙도 다르다. 쉽게 말해 세계관이 다르다. 그러니 이세계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사실 우리는 다른 세계를 오가며 사는 경험을 어릴 때부터 해왔다. 언제부터? 부모의 품을 떠나 어린이집에 나갈 때부터다. 그것은 이세계물의 주인공이 다른 세계로 전이(轉移)되는 경험과 같다. 환경과 사람과 규칙이 다른 곳에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다른 점이 있다면 눈앞에 시스템 창이 뜨는 대신 친절하고 숙련된 선생님들이 계시다는 정도겠다.


어린이집에서 시작된 이세계로의 전이 경험은 초-중-고와 대학을 거쳐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 계속된다. 사회에 나가면 끝인가? 결혼은 또 다른 세계다.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살다 보면 원하지 않게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경험을 언젠가는 마주하게 된다. 이직과 퇴직이 대표적이다.


이렇듯, 알고 보면 우리도 다른 세계로의 넘어감을 차례로 겪으면서 살고 있다. 이세계물의 주인공이 아닌데도 말이다.


어떤 세계에 살아도, 나는 나

그러나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 학교/회사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나는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같은 사람이다.


그것은 이세계물의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다. 방구석 폐인이 용사가 되었든, 여고생이 드래곤이 되었든 그 사람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주어진 환경이나 겉모습이 바뀜으로써 그의 본질이 더 잘 드러나기도 한다. 네이버웹툰 <역대급 영지 설계사>의 주인공 김수호처럼.


대한민국 서울에 살던 청년 김수호는 불행했다. 부모님은 빚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고, 홀로 좁은 방에서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며 살았다. 그러나 소설 속 세계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프론테라 남작가의 망나니 외아들 ‘로이드’에게 빙의한 김수호는 망해가던 영지를 왕국 최고의 영지로 발전시켰고, 국왕의 총애를 받는 몸이 된다.


로이드가 된 김수호가 이세계에서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대한민국 육군 병장의 삽질 실력과 근성? 현대의 토목공학 지식? 주인공 버프? 악마도 감탄할 정도의 돈에 대한 집착? 지옥의 노래실력? 다 맞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김수호라는 사람이다.


로이드의 호위기사 하비엘의 말을 빌리면, 김수호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결국은 책임을 완수하는 사람”이다. 마젠타노 왕국의 국왕 알리시아는 그를 “해야 할 일이 눈앞에 있을 때 한계까지 움직이는 자”라고 평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이세계 로라시아 대륙에서도, 김수호는 좌절하고 쓰러져 있기보다는 자신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 나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세계물은 현실도피적 망상일 뿐인가?

현생에서 실패한 주인공이 이세계에서 성공하는 스토리는 이 장르의 공식과도 같다. 이세계물이 인기를 끄는 이유인 동시에, 현실도피적 망상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대급 영지 설계사>의 로이드를 보면 이것을 현실도피적 망상이라고 함부로 폄하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고? 로이드, 아니 김수호는 현실에서 도망친 적이 없으니까.


그는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로라시아 대륙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 앞에서 눈물 흘렸던 적은 있을지언정 자신의 책임을 외면한 적은 없었다. 늘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해왔다. 다만 대한민국에서는 피우지 못했던 꽃을 이세계에서 피울 수 있었을 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희망이 없어 보였던 한 청년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소설 속 세계에 들어간 것 자체가 현실도피적 망상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세계에 떨어진 것은 그에게 선물이기도 했지만 시련이기도 했다. 김수호가 자신의 역량과 노력으로 그 시련을 선물로 바꾼 것이다.


소설 속 세계에서 로이드로 살고 있는 김수호는 ‘꿀빠는 노후‘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개고생 끝에 더 큰 개고생이 기다리는 패턴의 연속이다. 독자에겐 꿀잼이지만 그에겐 가혹한 일이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꿀빠는 노후를 실현하게 되는지는 모른다(원작 결말 안 봤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겠다. 김수호는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분명 잘됐을 거라고. 어떤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김수호는 김수호니까. 얼굴은 못생겼을지 몰라도 자신의 책임은 끝까지 완수하는 남자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게 <역대급 영지 설계사>는 현실도피적 망상이 아니라, 희망을 주는 이야기다. 나 또한 어디서든 내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 어떤 세계에서도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정답임을 상기시켜주는 이야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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