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츠바사(2017~), 『블루 피리어드』, 코단샤.
현대 사회에서는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남겨두고 생계를 위한 직업을 따로 가지는 것이 보다 합리적 선택으로 평가받는다. 그 반대의 선택은, SNS에서 응원댓글과 좋아요를 잔뜩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먹고 살 수는 있고?”라는 걱정이나 “집에 돈 많은가 봐?” 같은 질투 섞인 조롱을 듣기 쉽다.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는 길을 놔두고, 취미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면 더더욱.
그러나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좋아하는 일에 인생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만화 <블루 피리어드>에는 그런 멋진 바보들이 한 가득 나온다. 실제 도쿄예술대학 유화과 졸업생인 작가의 경험을 담아 그려낸 “미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2020년 일본 만화대상 1위를 수상했고,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소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안 보신 분들의 작품 감상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는 간절함
이야기는 안정적 삶을 지향하던 한 고등학생이 그림 그리기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시작된다.
이름은 야구치 야토라, 놀기도 잘 놀고 공부도 잘하는 고2 남학생이다. 호감형 외모에 똑똑한 머리,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들려줄 줄 아는 센스를 가졌다. 명문대에 진학해 좋은 회사에 들어가 평범하면서도 세속적인 중상류층으로 살아갈 능력이 충분했고, 본인도 그런 삶을 바라고 있다고 믿었다.
그림 그리기의 매력을 알기 전까지는.
잘하는 것은 많았지만 하고 싶은 것은 딱히 없었던 야구치에게 그림은 처음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켜서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비로소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리면 그릴수록 더 잘 그리고 싶고, 다양한 세계가 보고 싶어진다. “이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는 간절함”이 커져만 간다.
사람은 진짜 좋아하는 일을 만나면 간절함이 생긴다.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자녀가 예술(글이든 춤이든 그림이든)을 직업으로 삼으려 할때, 그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묻기보다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괴로워서 하는지"를 살펴 보라고. 만약 그렇다면 그때는 부모도 말리기 힘들 것이라고. 야구치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즐거움을 찾는 건 사치일까?
간절할 정도로 좋아하는 일이 있는 건 좋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잘 모른 채로 어른이 되는 사람도 많으니까.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먹고살 수는 있고?”
먹고사는 문제는 중요하다. 신성하다고 해도 좋다. 크게 부유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집안의 외동아들로서, “사회의 약간 높은 위치의 안전한 길”을 목표로 살아온 야구치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림에 빠져드는 자신을 경계했다. 이건 사치라고, 시간 낭비가 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을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한다. 아니, 프로 작가가 되기는커녕 당장 미대에 입학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도 없다.
고민하는 야구치에게 학교 미술부 담당인 사에키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해준다. "좋아하는 일에 인생을 가장 많이 투자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라고. 그 뒤로 야구치는 미술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미대 입시를 준비한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의 의미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는 건, 그 일에 인생을, 자신의 전부를 건다는 의미다. 이렇게 되면 먹고사는 문제와 좋아하는 일이 별개의 문제가 아닌, 하나의 문제가 된다.
야구치가 미대를 목표로 삼은 그 순간부터, 야구치에게 그림은 ‘즐기면서 그리되 자신의 전부를 걸고 그려야 하는 것’이 되었다. 대충 그린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런 건 취미로 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따위의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그저 매 순간, 지금 그리는 그림에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어야 한다.
데생을 해본 적도 없고, 원근법도 모르던 야구치였지만 한 장 한 장 그림을 완성할 때마다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늘 부족함을 느낀다. 최선을 다해 그린 그림도 다른 사람들의 그림 옆에 두면 초라해 보인다. 미대를 목표로 하는 동료들 가운데 자신이 제일 부족해 보인다.
그렇게 벽에 부딪힐 때마다 야구치의 그림은 성장한다. 좌절하고 있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입시학원 선생님의 조언대로 ‘트라이&에러’와 ‘트라이&에러’를 반복한다. 야구치에겐 이제 좌절이야말로 사치이기 때문이다. 그럴 틈이 있다면, 기술을 연마하거나 새로운 표현을 익히는 데 투자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이 마냥 즐겁지는 않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늘 즐거울 수는 없다. 오히려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도 잘되지 않을 때에 좌절감이 더 크게 들 수 있다.
그렇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지 않는 이유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크다고 하지만, 실은 그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도 잘 해내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질문이 너무 무겁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차라리 취미로 남기는 것이 안전한 선택일 수도 있다는 거다.
좋아하는 일에 인생을 투자하는 건 사치도 낭비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들 수 있다. 사람은 꼭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행복한 걸까?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도 돈을 잘 번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이 있는데, 그걸 하지 못하는 삶은 불행하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이 있는 사람은 노력하게 된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그리고 더 잘하기 위해서.
좋아하는 일에 인생을 가장 많이 투자한다는 건 그런 의미일 것이다. 꼭 지금 그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 않더라도, 삶의 우선순위를 그것에 두고 사는 것. 아무리 먹고사는 문제에 치여 바쁘게 살더라도, 틈만 나면, 아니 억지로 틈을 만들어서라도 계속 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스스로 즐거워하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 붓게 되는 것.
<블루 피리어드>에는 미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의 현실적인 고민과 어려움이 디테일하게 묘사되고 있다. 주인공 야구치가 미술 생초보에서 미대 입시를 거쳐 한 명의 작가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술을 보는 눈이 뜨이는 것 같고, 미술관 전시도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어지는 만화다. 그림도 예쁘고 현실성 뛰어난 스토리에 몰입감도 상당하다.
하지만 이 만화의 진짜 매력은, 좋아하는 일에 인생을 투자하는 기쁨과 재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그림을 그려서 먹고살아야 하는 세계의 냉혹한 현실을 살벌하게 묘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무적이라는 것을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답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나면, 나도 좋아하는 일에 내 시간을 쓰는 것이 더는 사치나 낭비로 느껴지지 않게 된다. 이직이나 승진을 위해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것만이 내 인생을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좋아하는 일에 더 많은 인생을 투자하는 것이 내겐 더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끝.
PS.
『블루 피리어드』는 2025년 2월 트레바리 독서클럽 <모두의 만화 아카데미아>의 읽을거리다.
지난번 ‘클럽 소개와 12월 후기’ 글이 리워드 이벤트에 선정되어, 2월부터 5월까지 ‘골든블랑’의 스파클링 와인이 모임에 제공될 예정이다.
2월 모임은 2월 27일(목) 오후 7:40(강남아지트), 독후감 마감은 2월 25일(화) 자정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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