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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행복을 꿈꾸는 소년의 발버둥 <체인소 맨>

만화 에세이 No.8, 『체인소 맨』(후지모토 타츠키, 2019~)

by Woo Play

후지모토 타츠키라는 작가를 <룩 백>으로 알게 된 사람이 <체인소 맨>을 보면,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걸 믿지 못할 수도 있다. 그보다 먼저 나왔던 <파이어 펀치>를 보면 살짝 이 작가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질 수 있다. (내가 그랬다...)


<룩 백>에서는 창작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그에 수반되는 고통, 사춘기 소녀의 우정과 질투와 선망, 상실의 아픔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체인소 맨>에서 보여주는 건 여자 가슴 주무르고 싶다고 외치면서 전기톱으로 악마들을 무자비하게 썰고 다니는 저속하고 나사 빠져 보이는 16세의 남자다. 뇌 빼고 보기 좋은, 성인이 즐기기 적당한 수위의 도파민 제공용 액션 만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만화에는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아마도, 남들에게는 쉬워 보이는 ‘평범한 행복’을 무척 멀고 어렵게 느껴봤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개똥 같은 현실이 때로 환멸 나고 버겁게 느껴져서 다 내려놓고 싶다가도 그래도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겠지 싶은 마음으로 죽을 만큼은 아니더라도 제 나름대로 발버둥 쳐봤던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다.


그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안 보신 분들의 작품 감상에 크게 방해되지는 않을 겁니다.)


흔하고 평범한 일상이 “꿈같은 삶”이었던 소년

이 만화의 주인공 ‘덴지’, 죽은 아버지가 야쿠자에게 진 빚을 어려서부터 홀로 갚고 있다. 신장과 눈알 한 쪽도 팔아버리고 없다. 머리에 전기톱이 달린 강아지처럼 생긴 악마 ‘포치타’와 함께 살면서 뒷골목 데블 헌터로 일하고 있지만, 수입의 대부분은 야쿠자가 가져간다.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식빵에 잼을 발라 먹어 보는 것과 여자를 안아 보는 것이다.


그 욕망은 흔하고 평범한 것이다. 대단히 어려운 목표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흔한 일상일 수 있다. 그러나 덴지에게는 평생 걸려도 이루기 힘들어 보이는 “꿈같은 삶”이다.


덴지는 크리스마스에 밀가루 탄 물에 설탕을 조금만 풀어서 포치타와 함께 마시면서 케이크 맛이 난다고 기뻐했다.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올 때면, 포치타를 안고서 오늘 밤 꾸고 싶은 꿈 이야기를 했다. 여자랑 알콩달콩 데이트도 해보고, 같이 게임도 하고, 그 여자의 품에 안겨서 잠드는 꿈을.


포치타는 덴지의 꿈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언젠가 덴지가 그 꿈을 이루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덴지가 결국 야쿠자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자신을 희생하여 그를 ‘체인소 맨’으로 부활시킨다.


체인소 맨 오프닝 캡쳐, MAPPA CHANNEL 유튜브



“너희는 원대한 꿈이 있어서 참 좋으시겠어”

체인소 맨이 된 덴지는 국가 기관인 ‘공안’ 소속 데블 헌터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면서, 매일 아침 식빵에 잼을 잔뜩 발라 먹고, 자신에게 호감 있어 보이는 멋진 외모의 여성과 함께 근무하는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삶을.


덴지는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칠 정도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쭉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할 정도로. 어딘가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만큼 진심이라는 소리다.


공안 데블 헌터는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강한 사명감이나 복수심 등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의 영웅 체인소 맨 덴지가 데블 헌터를 계속하는 이유는 그런 숭고한 데에 있지 않다. 공안을 그만두면 악마로서 처분당할 것이라는 이유가 첫 번째지만, 그보다 진지하고 중요한 목표가 있다. 이제 잼 바른 빵은 매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여자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해보고 싶다는 목표가.


저속하고 시답잖아 보이는 욕망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수컷들에겐 아주 흔한, 보편적인 욕망이다. 물론 그것이 일생일대의 꿈이자 목표라고 하면 한심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가? 인생의 목표가 꼭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어야만 할까? 맛있는 걸 먹고,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꿈이면 안되는가?


그런 덴지의 꿈을 비웃는 자들에게, 체인소 맨은 이렇게 외쳤다. “너희는 원대한 꿈이 있어서 참 좋으시겠어?!”라고.


극복하지 않는다. 그저 발버둥 치며 살아갈 뿐.

하지만 체인소 맨이 되었어도 원하는 것을 쉽게 얻지는 못한다. 오히려 체인소맨이 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경험까지 하게 된다. 덴지에게 여전히 현실은 가혹하고 부조리하기만 하다. 야쿠자의 빚을 홀로 갚던 어린 시절부터, 모든 악마가 두려워하는 체인소 맨의 힘을 얻은 후에까지도.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악이 똥 햄버거처럼 계속 쌓여가는 삶"이다.


덴지는 그런 현실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체인소 맨의 힘으로 조금이라도 현실을 바꾸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물론 그 반대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늘도 체인소 맨이 되어 악마를 죽이고 사람들을 구한다. 사명감이나 정의감 때문은 아니다. 그런 건 스파이더맨 같은 히어로의 것이지 체인소 맨의 것이 아니다.


피터 파커는 큰 힘을 지닌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이를 차마 외면하지 못해 스파이더맨이 된다. 모범적인 히어로다. 덴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가슴과 섹스를 위해 체인소 맨이 된다. 결과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처럼 보일 뿐, 히어로라고 부르기엔 고민된다. 그래서 안티 히어로나 다크 히어로라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열심히 발버둥 치고 있을 뿐인 소년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덴지와 내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나도 덴지처럼 평범한 행복을 추구했다. 남들 다 하고 사는 평범한 것들을 나도 쉽게 누릴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으며 따박따박 월급도 받고 있으니, 부유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추구하던 삶에 다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이 버겁다. 집과 회사를 오가며 사는 삶이 굴레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이제 좀 풀린다 싶으면 또 새로운 고통과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때때로 부족하고 나약한 나로서는 도저히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다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망갈 배짱도, 맞서 싸울 용기도 없다. 그래서 그냥 내 나름대로 발버둥 치고 있을 뿐이다.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아직 해보지 못한 재밌는 일들을 생각하며. 덴지처럼.



#체인소맨 #만화에세이 #만화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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