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도 책이다
사회생활 스몰토크 상황에서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독서’라고 답한다. 그리고 곧바로 덧붙인다.
“읽는 책의 70%는 만화책이고요, 25%는 에세이와 소설, 5%는 기타 등등입니다.”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상대가 같은 덕후라면, 서로 어떤 만화를 좋아하는지 탐색전을 펼친 다음 심도 깊은 덕질 토크로 넘어간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드문 경우다.
가장 흔한 케이스는 만화를 즐겨 보지는 않지만 재밌게 본 만화가 몇 개 있을 때다. 주로 슬램덩크, 원피스, 지브리 애니메이션 등 유명작이 많다.
“슬램덩크 재밌게 봤어요”
“오, 슬램덩크! 혹시 누구를 제일 좋아하셨나요?”
이런 식으로 잠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주의사항이 있다. 지나친 덕질 토크로 넘어가지 않도록 가볍게 끝내야 한다. 용어도 신경 써야 한다. “최애가 누구세요”라고 묻지 않고, “누구를 좋아하세요”라고 해야 좋다.
마지막으로 만화를 안 보시는 분들은 “아, 만화를 보시는구나…” 정도의 반응과 함께 화제를 돌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나도 빠르게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 우리는 상호 배려가 필수인 사회인 간의 대화를 하고 있으니까. 취미를 물어봐서 나는 솔직하게 답을 했을 뿐이고, 서로 이 주제로는 스몰토크를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아무 문제없다. 만화에 관심 없는 사람은 많고, 나도 그런 분들과 억지로 만화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으니까.
아주 가끔은 왜 나이 먹고 만화 같은 걸 보냐는 질문을 듣는다. 예전에는 이런 질문에 화가 나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이야기해보면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분들이 많았고, 비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기 때문이다. 질문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대게는 “다른 분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보다 만화가 좀 더 좋을 뿐이에요”라고 대답해 드리면 고개를 끄덕여준다.
가장 재수 없는 반응은 멸시다. 대놓고 멸시하는 경우는 없지만, 배려하고 인정하는 척하면서 은근하게, 그러나 알아차릴 만큼은 티 나게 하는 멸시. 그게 제일 싫다.
그런 멸시는 주로 자신의 고상한 취미, 혹은 독서 취향을 자랑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클래식이나 노벨문학상 작가의 소설이었다. 오해하지 마시길. 클래식이나 문학 애호가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그런 재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좋다. 나도 클래식을 싫어하지 않고,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듣는 것도 좋아하니까. 하지만 만화 주제가나 듣는 나를 애 취급하면서, 자신의 클래식 취향을 자랑하는 건 정말 재수 없었다. 사회생활이고, 내가 맞춰줘야 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넘어가 드렸지만.
책에 대해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내가 만화책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자기도 좋아하는 문학 작품이나 다른 책을 이야기하는 건 좋다. 서로 좋아하는 책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괜찮은 스몰토크가 되니까. 하지만 나도 ’아니 에르노‘의 책을 인상적으로 읽었다고 했을 때, “(만화나 보는) 네가 ’아니 에르노’를 알고 있다니 의외네”라는 식으로 반응한 건 기분이 나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분들은 애초에 내 취미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의 취미와 취향을 자랑하고 싶었을 뿐이다. 뭐, 그것도 괜찮다. 사회생활하려면 맞춰드려야지 어쩌겠나. 하지만 자신의 취미가 존중받길 원한다면 다른 사람의 취미 또한 존중할 줄 알아야 할 텐데, 그런 배려가 없는 사람과의 대화는 아무리 사회생활이라도 불쾌하다.
내 잘못일 수 있다. 아무리 만화/애니메이션이 대중화되었다고 해도, 섣부르게 사회생활하는 자리에서 그런 주제를 꺼내다니. 오타쿠 취급이 득 될 게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로서는 취미를 물어본 것에 솔직하게 답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굳이 솔직하게 답할 이유도 없기는 하다. 처음부터 “만화”라고 하지 않고 “독서”라고 한 다음에 “주로 만화책을 봅니다”라고 하는 것도 상대에 따라서는 좋게 보지 않을 수 있고. 만화 외에도 에세이에서는 “아무튼,”시리즈와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김민섭 작가님의 글을 좋아하고, 소설에서는 정세랑, 박서련, 장류진, 김동식 등의 작가님들을 좋아한다고 덧붙여봤자, 이미 “저 사람은 만화 오타쿠”라는 선입견을 가진 분들께는 어쩐지 위장용으로 보이는 것 같다. 차라리 말하지 말 걸.
그래도 나는 계속 만화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닐 것이다. 반항심리가 섞여 있음을 부정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그렇게까지 숨기면서 살 자신이 없다는 거다. 그 정도로 위장술에 능했으면 훨씬 인싸로 살았겠지. 또한, 아무리 사회에서 만난 사이라고 해도 라뽀 형성을 위한 스몰토크 상황에서 거짓을 말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않은가. 그냥 서로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인데 내가 그렇게까지 눈치 볼 이유도 없고.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데 변명이 필요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닐까. 만화책도 책이다. 나도 그냥 사람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