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장송의 프리렌>을 재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신선한 일본식 판타지라는 평을 보고 1~2권을 사서 읽어봤지만, 전개가 느릿하고 전투도 심심해서 그냥 도입부가 독특한 흔한 판타지 중 하나라 여겼다. 이렇게까지 인기를 끌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애니메이션화가 되더니, 심지어 일본 만화대상에서 1위까지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요즘 트렌드는 정말 모르겠네. 이렇게 잔잔한 만화를 좋아하다니…’ 하며 모른 척하려 했지만, 얼마 뒤 내 딸들까지 “애니 꿀잼이던데 왜 안 봐?”라고 하길래 결국 항복했다. ‘내가 감을 못 잡은 건가? 대체 뭐가 있길래…’ 하는 마음으로 애니메이션을 틀었다.
그리고… 또 울고 말았다. 영화나 만화를 보며 우는 일,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됐는데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주체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
이 만화는 마법이다. 짧은 시간을 더 치열하게 살게 하는 마법.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초반부 스토리 약간.)
“그 백분의 일이 너를 바꿨으니까”
주인공 프리렌은 천 년을 넘게 산 엘프 마법사다. 용사 힘멜, 전사 아이젠, 성직자 하이터와 함께 파티를 이뤄 마왕을 쓰러뜨렸다. 장장 10년에 걸친 대모험이었지만, 프리렌은 그 시간에 많은 의미를 두지 않았다. 천 년을 넘게 살아온 자신에게 10년은 인생의 100분의 1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라고 하면서.
영원에 가까운 수명을 지닌 엘프라서일까? 프리렌의 시간 관념은 인간과는 많이 다르다. ‘시간이 아깝다’는 개념이 없는 것 같다. 감옥에 1년 넘게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릴 들어도 “잘됐네. 마도서나 실컷 읽지 뭐”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꽃씨 하나를 찾는데 반년이 넘게 걸려도 괜찮다.
프리렌의 느긋하고 태평한 시간 관념은 어느 사건을 계기로 바뀌기 시작한다. 바로 용사 힘멜의 죽음이다. 프리렌은 인간의 수명이 짧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프리렌은 힘멜이 죽고 나서야 왜 조금 더 그를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라며 후회한다. 프리렌이 힘멜을 좋아했는지는 프리렌 자신도 모른다. 다만 힘멜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제 힘멜에게 그 마음을 전할 수도,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힘멜의 죽음으로 프리렌은 ‘지금하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후회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후회로 시작되는 여행을 떠난다. 힘멜과 함께 했던 인생의 100분의 1이 드디어 프리렌의 삶을 바꾸기 시작하는 순간이자, 작품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제 인생으로 치면 이분의 일이 되네요”
느긋하고 태평한 시간 관념을 지닌 프리렌과 대비되는 두 인물이 있다. 하나는 용사 힘멜, 그리고 또 하나는 프리렌의 제자인 페른이다.
인간의 수명을 지닌 이들은 프리렌과는 달리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자신의 시간은 물론 타인의 시간조차 신경 쓰지 않는 프리렌에게 대처하는 두 사람의 방식은 정반대였다.
용사 힘멜은 기다렸다. 인간의 몸으로 엘프의 시간을 기다리다 50년만에 프리렌과 재회했지만 곧 삶을 마감하고 만다. 그의 죽음으로 프리렌은 시간의 유한함에서 비롯되는 슬픔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제자 페른은 기다릴 수 없다. 프리렌에게는 인생의 백분의 일도 채 안 되는 시간이 그에겐 인생의 이분의 일이나 되는 커다란 세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일에 수 개월 혹은 일년씩 매달리는 프리렌을 보면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프리렌은 그런 페른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한다.
힘멜을 떠나보내고 난 뒤로는 주어진 시간이 짧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마음을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로는 안 됩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할 수 있겠지’. 또는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겠지’. 이런 생각만 하고 있다가 소중한 무언가를,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은 안다. 마음 속에 담아만 두고 해주지 못했던 말, 베풀지 못했던 행동들이 평생 잊지 못할 후회로 남는 것을.
프리렌도 힘멜을 잃고 나서 그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일까? 고령으로 죽음을 앞둔 동료 성직자 하이터의 앞에서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하이터는 전쟁으로 고아가 된 어린 소녀 페른을 거두어 홀로 키우고 있었는데, 프리렌에게 자신이 죽기 전에 페른을 데리고 떠나 달라고 부탁한다. 그 아이에게 더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경험을 하게 하고 싶지 않다면서.
프리렌은 거절한다. “네가 죽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은, 그 아이한테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고 될 수 있는 한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는 거야.”라면서. 그때 프리렌이 흘린 눈물에는 자신의 무지로 힘멜을 허무하게 떠나보낸 것에 대한 깊은 후회가 담겼다. 하이터와 페른이 자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진심이 담겼다. 나는 여기서 프리렌과 함께 울었다.
이제 프리렌은 새로운 모험을 떠난다. 마족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함도 아니고 전설의 보물을 찾기 위해서도 아니다. 힘멜에게 해주지 못한 말을 전하기 위해 천국을 찾아가는 모험이다. 프리렌에게는 후회를 조금이나마 만회할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판타지 속 엘프와 달리 짧고 유한한 시간을 사는 우리 인간에겐 후회를 고칠 시간도 모자르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과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던 용사 힘멜처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