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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한 퇴사를 하고 있는 걸까? (1/2)

by Woo Play

문득 지금의 내가 조용한 퇴사를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현재 나의 직장생활 모토는 “회사에서는 가능한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자”다. “스트레스 받지 말자”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스트레스를 예방하거나 해소하는 데에도 에너지는 들어가니까, 그런 에너지까지도 가능하면 아끼고 아껴서 좀 더 나를 위한 일에 사용하고 싶다는 의미다.


회사에서는 되도록 생각 없이 시키는 일만 기계적으로 하고 싶다. 이렇게 보면 나는 조용한 퇴사 상태에 있거나, 조용한 퇴사자로 살기를 원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업무에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과연 조용한 퇴사를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조용한 퇴사가 맞는가?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다. 글을 쓰며 정리해보기로 했다.



열정적 직장인에서 조용한 퇴사자로


회사에서 가능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겠다는 건, 조용한 퇴사자로서는 올바른 선택이다. 그래도 최소한의 맡은 일은 하겠다는 거니까 월급도둑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월급도둑이라고 불려도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회사를 다녔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자발적/비자발적으로 조용한 퇴사를 하고 있는 대부분의 직장인들도 그럴 것이다. 어떤 계기를 통해 열정적인 직장인에서 조용한 퇴사자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은 각자 다르겠으나, 최종적인 단계에서는 대체로 비슷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 같다. 바로 “Work is not your Life”라는 깨달음에.


나의 경우 수년 전 평가 결과에 이의신청을 제기했을 때가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다. 그때 나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내렸던 상급자와의 면담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나는 잊지 못한다.


당시 나는 예년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성과를 올렸음에도 입사 이래 최저의 평가를 받았었다. 우리 회사의 평가 등급은 S, A, B, C, D의 5등급이다. 내 점수는 C에 해당하는 구간이었고, 이는 하위 30%를 의미했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점수였다. 나는 이의신청을 제기하고 평가자에게 이유를 물었다. 내 업무 역량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맡은 업무의 중요도가 낮아서인지를. 그는 즉답을 피하면서 거꾸로 질문을 했다.


"ㅇㅇ씨,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나요?"

"좋아합니다. 적성에도 맞고요, 솔직히 저와 잘 맞는 일을 하고 있는 것에 감사한 마음도 있어요."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ㅇㅇ씨가 평가 점수를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가 점수가 낮다고 해서 ㅇㅇ씨가 그정도 점수의 인간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요구한 것은 평가 결과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었는데, 그는 설명이 아니라 설득을 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성적인 언어가 아닌 감정적인 언어로써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낮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상대평가니까요. 누군가가 좋은 평가를 받으면 누군가는 낮은 평가를 받아야 하지요. 나는 그걸 결정하는 사람으로서 고충이 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맡은 업무는 팀의 중심 업무이고, 좋은 평가를 받아왔던 예년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은 성과를 냈습니다. 지금처럼 낮은 점수를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나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지금 이 점수에 의미를 두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왜죠? 점수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나도 안다. 상대평가는 잔인한 제도고, 평가자도 괴롭다는 것을. 그래서 그가 솔직하게 이야기해주기를 바랐다. 회사가 내 업무를 중요하게 평가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이야기해주기를 바랐다. 억울하게 생각할 수는 있어도, 차라리 납득하긴 쉬웠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이번엔 내가 나쁜 평가를 받을 차례였을 뿐이라고 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말조차 해줄 생각이 없었다.


"ㅇㅇ씨, 이 일을 좋아한다고 했지요?"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나요? 말씀드렸듯이, 이 점수는 ㅇㅇ씨를 전부 대변하지 못합니다. 그냥 점수일 뿐이에요. 하시는 일에 스스로 자부심과 애착을 가질 수 있으면 점수는 아무 의미가 없지요."


요컨대 남이 평가하는 점수에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라는 조언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월급 받는 것에 만족하라는 말이기도 했다.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지금 그가 나에게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생 상담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평가 결과에 대한 설명을 들으러 왔으니까. 하지만 그는 설명 대신 조언을 가장한 궤변을 내놓았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차라리 주사위를 던졌다고 하세요"

"네?"

"점수 의미 없다면서요? 그럼 부서장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점수를 매기시는 거죠? 차라리 주사위를 던진 결과였다고 하시면 납득하겠습니다."


이후 몇 마디 대화가 더 오갔지만, 의미 있는 진전은 없었다.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평가 결과에 대한 설명을 듣기는커녕 농락만 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그런 말을 한 건 그가 이상한 사람이라서도 나쁜 사람이라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회사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했다. 그 말의 진짜 속 뜻은 이거였다고 생각한다.


“회사는 당신이 하는 일과 당신의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 없어도 회사는 굴러가고, 당신의 업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태업을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성실한 태도로 일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수한 평가를 받지는 못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을 기회는 종종 생기겠지요. 마침 당신은 자신의 일을 좋아하기까지 한다니 다행이네요. 부디 그걸 기쁨으로 여기고 사세요.”


이 면담 이후로 회사에서 뭘 잘하고 싶은 생각도, 의지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둘 수도 없다. 누칼협 꼬이직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겐 없으니까. 그러나 능력이 없다고 해서 쓸모없는 사람 취급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모르겠다.


이때부터 조금씩 조용한 퇴사자로 변해왔던 것 같다. 당시에는 조용한 퇴사라는 개념을 몰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과연 내가 진짜 조용한 퇴사를 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 내게는 회사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다. 평가를 잘 받거나 승진을 하고 싶다는 욕망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그런 욕망이 없진 않다. 다만 보다 본질적으로 내가 하는 일, 내가 이룬 것들에 대해 순수하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과는 다르다.


그래서일까? 조용한 퇴사를 결심한 지금도 종종 퇴근 후에 회사 일을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마음이 편해서 그런다. 기계적이고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잘되지 않는다.


모든 기대를 다 내려놓고 조용한 퇴사자로 살기를 마음속으로 선언한 이후에도 내가 계속 이러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나는 정말 조용한 퇴사를 바라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회사에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는 걸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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