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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 Jan 21. 2019

용서

“용서된 존재는 무고한 존재가 아니다. 그 차이는 무고함을 용서 위에 놓도록 해 주지 않는다. 그 차이는 용서에서 행복의 한 잉여를, 화해의 낯선 행복을, 행복한 죄(felix cupla)를 식별하게 해 준다.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여기에 대해 놀라지 않는 일상적 경험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김도형, 문성원, 손영창 옮김) P.429


이 구절이 포함된 본문을 근래 세미나 시간에 다시 읽었다. 그리고 ‘용서’라는 우리 삶 속의 현상에 대하여, 다시 한번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전에도 이 주제로 수업이 한 번 열렸던 적 있어 다양하게 이야기를 나눠봤었지만 참으로 까다롭고 미묘한 주제인 데다, 사람에 따라 머리로는 이해할  있어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지점 역시 포함 있어, 참으로 어려운 주제였다.


내 생각에 기본적인 갈림길 중 하나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혹은 용서해야 하는 쪽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면 ‘용서받는’ 혹은 용서받아야 하는 쪽이라 생각하는가에 있는 것 같다. 이제까지 스스로가 뭐 특별나게 큰 잘못이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며, 선량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아마도 본인이 앞으로 누군가를 용서하면 용서했지 굳이 용서받을 자리에는 서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본인에게 피해를 준 그 누군가에 대하여, 어렵고 힘들지만 할 수 있다면 스스로의 피해와 상처까지도 감내하고 승화시켜, 숭고하게 용서를 건네는 장면을 그려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우리가 근본적으로는 ‘용서받는’ 쪽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용서가 우리 삶 속에 너무나 일상적인 경험이라고도 말이다. 조금만 더 의미를 강화해 보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종의 용서를 받고 있으며, 그러한 용서에 힘입어 살아간다고도 말할 수도 있을까. 그렇다면 이야기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 삶 속에서 용서받아야 하는 어떠한 죄나 잘못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한 물음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용서받아야만 하는 걸까.


기본적으로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다할 것을 강조하는 철학자이니, 절박한 호소로 현현하는 타자의 얼굴에 응답하지 못하고 외면해버리는 것은 레비나스에게 있어 일종의 용서받아야만 할 일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어차피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에 대한 책임은 짊어지면 짊어질수록 더욱 무거워지는 것이고, 응답하고 또 응답한다 해도 끝내는 다 응답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통받고 소외당하는 타자는 이 땅에 너무나 많으며, 그래서 어느 때든지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타자를 마주한 적이 없다면 아마도 우리가 만성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중일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가 그만한 무게를 우리 용서받아야 할 죄로 올려놓는다면, 우리는 그 죄에 도리어 짓눌리고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레비나스가 이 ‘용서’라는 개념을 등장시킨 맥락은, 사실 번식성이라는 레비나스 특유의 개념과 관련해서이긴 하지만, 어떤 새로움과 재시작을 가져오기 위해서이다. 어떤 부족함이나 실패가 있었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의 행위들로 인해 잠시 무너지거나 떨어지거나 이탈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 머무르거나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지 않고, 그 실패를 또 다른 상황이나 기회 속에서 만회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며, 다시 해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단순히 면죄부가 아니라 행복한 죄인 것은 피해버리고 잊어버리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은 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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