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송명희 시인의 시 「나」의 끝부분이다. 이 시에 노래를 붙인 곡을 지난주 교회에서 듣고서 옛 기억이 떠올랐다.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은 희미하지만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나의 그 성장기를 함께 해주셨던 교회 선생님이 계셨다. 약간은 고집스럽기도 하셨던 것 같지만 대단히 헌신적으로 대해주셨고, 나는 그 어린 투정을 부리면서도 마음속으론 무척 따랐었던 것 같다. 늘 일하시느라 부모님 두 분 모두 바쁘셨어서, 혹은 두 분 사이 갈등이 많으셨어서, 어쩌면 기댈 수 없거나 마음이 굳어버릴 수 있었을 어느 시점들에, 그래도 그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어떤 관심과 헌신들 덕분에 나는 마음을 지킬 수 있지 않았나 지금에서는 생각한다.
그 선생님에 관한 기억 중에, 이 「나」라는 곡을 가장 좋아한다 하셨던, 이 곡의 가사가 된 시를 지으신 송명희 시인께서는 뇌성마비로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시는데도 이러한 시를 쓰셨다고, 감동적이지 않냐고 (교회 용어로는) 은혜롭지 않냐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다. 이 곡을 들을 때면 언제나 그런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 선생님께는 장애를 타고난 동생이 있었고 넉넉지 않은 형편에 또 동생을 책임져 가며, 우여곡절을 많이 겪으셨다 들었다. 송명희 시인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삶이 그리 만만치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곡에서 가장 마음에 박히는 단어는 ‘공평’하다는 말이다. 어떻게 공평하다 말할 수 있었을까, 그 공평하다는 말에 공감할 수 있었을까. 그 공평하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공평하다는 말의 저울 한쪽에 올려야 할 '나'의 사정은, 아마도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고, 자기 삶에서 겪어나가는 고통이나 어려움은 어떤 식으로든 다 가지고 있을 것이며, 외부에서 어떻게 평가하든 자기에게는 그 사정이 더욱 가볍거나 무겁게도 여겨질 수도 있으니 그 무게를 쉽사리 판단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 선생님의 사정이나, 송명희 시인의 사정을 올려놓으며 공평하다 말할 수 있기 위해선, 그 저울의 다른 쪽 접시에 과연 무엇을 올려놓아야 할까.
이 공평함을 주관한다는 신의 역할에 관하여 이야기해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그 공평함이란 단어로, 자신의 삶을 해석해낼 수 있는 그 마음에 대하여 더욱 주목해 보고 싶다. 아마도 자기 삶 속의 고통이나 문젯거리들에만 집착하고 파고든다면 그 무게는 한없이 무거워질 테고, 저울의 수평은 결코 맞춰질 수 없을 것이다. 우선은 시선을 다른 쪽 접시로 돌려야 한다. 내 삶의 다른 요소들을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다른 쪽 접시에는 무엇을 올려놓아야 할까. 이 질문이 참으로 쉽지 않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한결 더 폭넓게 혹은 색다르게 바라보는 자리를 열어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공평’하다는 자기 삶의 해석과 선언 그 자체가 놓이는 게 아닐까. 그 다른 쪽 접시에 내 삶의 아무리 긍정적이고 아름다움 요소들을 올려놓은들, 나의 고통과 문젯거리들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렇게 바라봐지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먼저 그 공평함이라는 저울을 마음속에 그려내고, 그 저울 한쪽에 나의 고통을 올려놓으며 다른 쪽 접시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 그러한 마음 자체가 공평하다는 말을 해낼 수 있는 마음의 위대함이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공평함이란 저울은 그 한쪽에 심지어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다 하더라도 수평을 맞출 수 있는 저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