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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금욕주의자 ‘나(화자)’와 쾌락주의자 조르바의 만남.


모든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며 생각하길 멈추지 않았던 ‘나’는 생각하는대로 행동하며 말하는대로 살아가는 ‘조르바’를 만난다. 서로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상생하는 동거는 이성과 감성의 현실태를 목격하는 듯 하다.


서사가 많지 않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흡입력이 대단한 이유는 아마 장면 한 순간마다 섬세하게 묘사된 작가의 예술적인 문장력 때문이겠지.




— 글귀 모음 —-

그 친구가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을 때, 불쑥 솟아오르던 그 분노의 순간을 다시 살(生) 수 있다면! 나는 그 순간 내가 살아오던 인생이 그 말로 집약되어 버린 데 몹시 화를 내지 않았던가? 인생을 그토록 사랑하던 내가 어쩌자고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에다 그토록 오랫동안 내박쳐 둘 수 있었단 말인가! 그 이별의 날, 내 친구는 내가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해준 셈이었다(14p).


나는 그의 늙은 육신이 그 난폭한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공중에서 수천 조각으로 찢어져 바람에 사방으로 날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하지만 내 고함 소리가 무슨 소용 있으랴! 조르바에게 어떻게 지상에서 지르는 내 고함 소리가 들릴 수 있으랴! 그의 오장 육부는 새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었다(105p).


나는 달빛을 받고 있는 조르바를 바라보며 주위 세계에 함몰된 그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 모든 것(여자, 빵, 물, 고기, 잠)이 유쾌하게 육화하여 조르바가 된 데 탄복했다. 나는 우주와 인간이 그처럼 다정하게 맺어진 예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193p).


전에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시편들이 그날 아침에는 느닷없이 지적인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문명의 사양은 그렇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인간의 고뇌는 정교하게 짠 속임수(순수시, 순수 음악, 순수 사고) 속에서 그렇게 끝나기 마련인 것이다(196p).


나는 인간의 고통에 따뜻하게, 그리고 가까이 밀착해 있는 이들을 존경했다(238p).


돈 같은 건 악마나 물어 가라고 그래요! 그걸 가지고 뭘 합니까. 내 인생살이가 지긋지긋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담배가 피우고 싶을 뿐이에요(244p).


“모르신다!” 조르바의 둥근 눈이 놀라움으로 열리면서 소리쳤다. 내가 춤출 줄 모른다고 고백했을 때와 표정이 똑같았다. 그는 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렇게 소리쳤다. “아니 두목, 당신이 읽은 그 많은 책 말인데…. 그게 뭐 좋다고 읽고 있소? 왜 읽고 있는 거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책에 없다면 대체 뭐가 쓰여 있는 거요?”


육체가 와해되어 버린 뒤에도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잔재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영원불멸을 그리는 우리의 끝없는 염원은 우리가 영원불멸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짧디짧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인가 영원불멸한 것을 섬기는 데서 유래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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