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을 존중해 주세요
내 일이 힘든 만큼 남의 일도 힘들다
계약직은 확실히 오래 머물 자리는 아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래 머무르면 안 되는 자리는 주 업무가 주로 그냥 잡일과 허드렛일일 때이다. 업무 능력을 향상하는 데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일에서 나만의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다면 발판이 되는 좋은 기회겠지만 대개는 그 일로 연결되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계약직의 잡무 중 하나인 탕비실의 커피 및 과자 채우기를 보면 거의 단순 반복적인 일이고 안타깝게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업무도 아니다.
분명 노력과 수고가 들어가는 데도 사람들은 고마워하기보다는 온갖 불만과 트집을 잡아낸다. 커피가 별로다느니, 과자 고르는 센스가 없다느니... 모든 사람의 입맛을 맞추기 힘들뿐더러 여기가 대형 마트도 아니고 그렇다고 뷔페도 아닌데 개인의 취향을 모든 개인이 고집한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도 채우고 또 채워도 어디선가 불만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주 업무가 이런 잡무일 때면 정말 업무 의욕도 상실되고 점점 미래가 암울해 보이기까지 한다. 만약 여기서 빅데이터를 이용해 직원 모두의 취향을 파악하고 자동으로 간식 주문 및 배송까지 연결시키는 시스템을 개발한다면(물론 그 시스템이 대박 날지는 모르겠지만) 이 업무가 나를 발전시키는 업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무실 화초에 물을 주다가 식물 키우기에 통달하여 식물 관리사(?)가 된다면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식물 키우기에 별 관심이 없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초반에는 다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분노가 일다가 나중에는 그냥 적당히 욕먹고 사는 방법을 택한다. 문제는 그 적당히 욕먹는 것을 내 자존감과 연결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필시 벗어나기 힘든 위치 때문에 우울증이 생긴다. 애초에 내가 원하는 자리도, 원하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 나은 자리로 가고픈 욕망과 현재의 내 자리의 간극이 커서 벌어지는 일이다.
내가 하고픈 일과 실제의 일이 다른 것은 비단 계약직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인정받는 일을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정도이다. 그래서 계약직의 업무는 흡사 가정주부의 노동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나의 일을 존중해 주세요'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사람들이 진짜 그렇게 하느냐는 내가 선택할 수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일이 가장 힘들기 때문이다. 예전에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대기업 정규직으로 근무했는데 연차가 쌓일수록 일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때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계약직 사원이 너무 편해 보여서 비록 돈은 못 벌어도 차라리 저렇게 속 편하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마침내 사표를 쓰고 같은 계열사 계약직으로 취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예전이라면 다 정리된 회의실로 들어와 회의 진행을 했을 텐데 이제는 회의 시작 전 간식 세팅을 하는 입장이 되어 일을 하다가 문득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며 후회의 감정과 치열했던 정규직 때와 마찬가지로 우울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땐 돈이라도 많이 벌었지.......
결론은 내가 발전할 수 있는 자리든 아니든 간에 무조건 도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쉽지 않다면 나부터 먼저 내 일을 존중하며 무엇보다도 통장에 꼬박꼬박 들어오는 돈을 보며 힘내자. 이런 걸 금융 치료라고 한다나? 어쨌든 내 일이 서러운 만큼 남의 일도 힘들다는 것을 역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