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시작되었다
축축한 비보다 감미로운 빗소리가 좋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은 괜히 마음이 센티해진다. 어린 날엔 비 오는 게 좋았다. 특히 밖이 매섭고 추운 날일수록 방안에 이불을 꼭 끌어안고 아름답게 들려오는 비의 연주는 환상적이다. 거기에 따뜻한 코코아까지 있으면 천하를 가진 자도 부럽지 않았다. 그런 비가 싫어지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부터였을까? 한 손엔 가방을 들고 한 손에 태풍에 곧 날아갈 것 같은 우산을 힘겹게 붙잡아야 했기에. 하지만 본격적으로 비가 싫어진 건 비가 와도 일터로 나가야 하는 때부터이지 않을까. 어른의 무게를 짊어진다는 것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어른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이불속에 폭 안겨 빗소리를 연주삼아 운치만을 즐길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을 불행하게 보진 않는다. 마음먹기에 따라선 여전히 내리는 이 비가 삭막한 사무실에 내리는 단비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 궂은 날씨에도 야외에서 일하는 이에겐 힘든 일일수 있지만 땡볕에서 일할 때를 생각하면 또 하나의 쉼이 된다. 그럼에도 퇴근길을 생각하면 비가 좀 그치기를 바라는 나지만... 헷.
비가 나를 어른으로 이끈 것은 아니다. 어릴 때도 비는 왔고, 눈보라도 쳤다. 다만 그날의 나는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았고 어른의 지금은 스스로를 보호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누군가를 보호해야 하는 위치에 오른 것이랄까. 여전히 이 유약한 어른은 나 자신을 보호하는 일도 버겁다. 서글픈가? 아니. 때론 누군가는 내가 위태롭고 풍전등화처럼 곧 꺼져버리진 않을까 걱정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어른은 어떤 삶의 위협도, 어떤 어려움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늘 다시 내리는 비 때문에 불편하고 버겁지만 또다시 비가 그칠 것을 알기에, 그걸 깨달았기에 때론 내리는 비를 기뻐하며 묵묵히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일부러 비 맞으면서 뛰어놀던 때가 있었다. 흠뻑 비를 맞고 놀면 즐겁지만 감기에 걸리기 일쑤다. 하지만 가끔 비옷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면 벗어던지고 그냥 비를 맞아도 된다. 그러다 또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방향이든 자신의 삶을 책임질 사람이라면 잠시 철없는 어른이어도 좋다. 나의 경우, 밤에 잠들기 전 빗소리 ASMR을 켜놓고 잠드는 걸 보면 역시 비를 맞는 것보단 비를 느끼는 걸 좋아하기에 그 은신처가 내겐 더 중요한 것 같다. 결국 내 인생 내가 책임지라는 말인가? 어째 그 말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 거야. 오늘도 역시 머릿속에 생각했던 글감과 다르게 흘러가는 경이로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