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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 Apr 16. 2021

웃어라, 아무 일도 아닌 게 된다

심각하게 받지 않으면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날의 싸한 분위기, 그날의 무거운 적막감. 그날, 방년 18세. 꽃다운 나이에 사랑을 찾아 날아가진 못해도 책상에 고이 앉아 훗날의 날갯짓을 위한 준비를 하는 시기에 우리 집엔 빨간딱지가 날아왔다. 야자를 마치고 집에 온 날, 아버지 집을 나가시고(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가출이 아니라 외출이다) 어머니는 앓아누우사 내 하나뿐인 형제는 학교에서 돌아와 가방도 풀치 앉은 채 그대로 굳어있었다.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았고 그날의 분위기를 설명하기라도 하듯 집안 곳곳에 붙은 빨간딱지만이 내 운명을 말해주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이게 뭐냐고. 물론 그 물음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고 내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종종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다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고 드디어 그날이 임박한 건가 생각했다. 한편, 나는 괜히 막내가 아니었기에 그 심각한 상황에서도 TV에 붙은 차압 딱지를 보면서 더 이상 TV를 못 보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평소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차압 장면이 떠올랐는데, 내가 본 바로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고급진 주택에 들어와 도자기에 척, 미술품에 척, 고급 소파에 척척 붙이던 장면이 우리 집에 붙은 차압 딱지와 너무 대비되었다.


우리 집엔  잘 구워진 도자기도, 고가의 미술품도 없거니와 TV, 냉장고는 가전제품이라 그렇다 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쓰던 그 낡고 낡은 책상에까지 붙은 빨간딱지가 초라해 보이며 얼마나 붙일 재산이 없으면 저기까지 저렇게 붙여야 했을까 우스웠다. 밖에 내놔도 아무도 가져갈 것 같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혼자 빵 터지며 까르르 넘어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철이 없었다. 어쨌든 그 웃음 덕분에 내 형제도 웃음이 터지며 얼음 땡 했고 주섬주섬 가방을 풀었다. 빨간딱지에는 사용을 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붙어 있었기에 엄마에게 TV를 보면 안 되는 거냐고 물었다. 무어라 대답을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엄마는 내가 한심해 보였을까,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내 범법(?) 행위를 고백하고 싶진 않았지만 여하튼 그날 빨간딱지는 건드리지 않은 채 TV를 켜서 보았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내 일상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솔직히 그 당시가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집에 무슨 일이 있냐는 누군가의 대수롭지 않은 물음에 눈물이 툭 터질 만큼 나 역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웃는 순간,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일이 아무 일도 아닌 게 되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어린 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걸 겪으며 깨달은 것은 어떻게든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이 내 맘대로 안돼도 그냥 웃어라, 그럴 수도 있다고. 별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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