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상집

황량한 세상 속에서 좋은 어른이 되는 법

by 현범

내란. 탄핵. 사형. 수괴. 적폐. 계엄.


근래의 우리는 듣기만 해도 무서운 낱말을 가슴에 달고 산다. 황량한 단어들의 틈 속에서 감성은 빛을 잃고, 사랑도 사라져간다.


그들은 왜 하필 12월 3일을 택했을까. 고단했던 한 해를 정리하고 서로의 안복을 빌어주어야 할 겨울에 왜 이 일을 벌였을까. 그들은 왜 가족에 대한 걱정만으로도 버거운 사람들에게 나라에 대한 걱정까지 안겨준 걸까. 그들은 왜 우리의 일상을 유린했으면서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않는 걸까.


부끄러움은 늘 피해자의 몫이다. 얼마 전에는 10년 넘게 정치학만 공부한 교수들이 집담회를 열었다. 그들은 자신이 그동안 뭘 배우고 가르쳤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부끄러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또 얼마 전에는 평생토록 노동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한 장년의 여성을 만난 적 있다. 그는 계엄 사태를 통해 자신의 청년 시절 노력이 무상하다고 느낀다고 고백했다. 평생 자신이 믿는 가치 하나를 지키기 위해 싸워온 사람들의 믿음이 내란 세력에 의해 부정당한 것이다.


내란을 획책한 세력은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이제 계엄 자체의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다. 내란이 아니라 “소란”이었다고 주장하며 “탄핵은 입법 독재”라 말한다. 정의와 진실의 경계가 차츰 흐려지고 있다.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아이들을 상상한다. 이런 사회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큰 꿈을 꿀 수 있을까? 올해 독서 논술로 만난 중학교 1학년생 아이는 나에게 왜 굳이 착하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비겁하고 야비하게 권력에 굴종하며 사는 사람은 승리하고,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패배하는 사회 속에서 아이들은 무슨 꿈을 꿀 수 있을까? 어린 시절 학교에서 마주한 어른들은 내게 융통성이 없다며 순리대로 살라고 말했다. 현실이 이런데 뭐 어쩔 수 있냐는 말이었다. 그 말이 참 비겁하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그 말이 오히려 꿈 많고 잠재력 높은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정말 몰랐던 것일까?


몇 주 전에 쓴 글에서 주장했듯 우리 사회의 헌정주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이제 장기전에 돌입했다. 진보와 보수의 싸움도 아니고, 좌파와 우파의 싸움도 아니며, 사회주의 대 자유주의의 싸움도 아니다. 지금의 싸움은 헌정주의와 독재주의의 싸움이고,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의 싸움이며, 정의와 부정의의 싸움이다. 이 혼동의 시국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제도 정치라는 거창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 문제의 원인이 제도 정치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상 속에서 우리 사회는 공공정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성공 방법론에만 혈안이었다. 그 사이 승부에서 진 사람들은 나태한 패배자로 낙인 찍히고 있었고, 애초에 출발선의 한참 뒤에서 경쟁을 시작한 이들은 경쟁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권력에 기승하는 태도더러 현실주의라고 추켜세웠고, 권력에 기승하지 않고 ‘자아’와 ‘주체’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의 생각은 아이의 공상과 같은 태도라며 무시했다. 공공의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태도는 안이한 이상주의로 치부했다. 이외 여타 모든 일상 속 모든 문화는 정의에 무관심했고, 폭력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이 모든 요소들이 만들어낸 것이 증오정치로 이끌었고, 정치의 양극화를 초래했으며, 윤석열을 만들었고, 계엄으로 이끈 것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에 관심을 갖자, 참여를 하자 등 제안도 있겠으나 나는 그런 제안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제안을 하고 싶다. 일상 속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좋은 어른은 아이의 꿈을 함부로 짓밟지 않는다. 경험과 연륜을 근거로 무경험자의 사고방식을 이상주의로 치부하지 않는다. 현실이 이러하니 어쩔 수가 없다는 논리를 아이에게 주입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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