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공항 참사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네온사인이 만개한 밤. 나뭇가지에 매달린 단풍잎이 바람에 나부꼈다. 바닥에 툭 떨어져 갈지자로 굴러갔다.
겨울바람에 코끝이 시리자 나는 급하게 재킷 지퍼를 올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1차선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시동 끄지 않은 오토바이 위에 앉은 배달부 세 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이들은 입에 담배꽁초를 물고 있었다. 광대가 드러날 정도로 담배를 빤 뒤 내뿜었다.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뒤로는 비니를 눈썹 언저리까지 내려쓴 장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충혈된 두 눈은 신호등을 향해 있었다. 맞은편에는 한 젊은 여자가 검은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헤드폰을 끼고 있는 그녀는 신호가 바뀐 지도 모르고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인도 위를 걷다가 우연히 흰색 백열등이 환하게 빛나는 복권 판매점을 보았다. 문 맞은편의 벽걸이 TV 속에선 연신 어제의 비행기 사고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장면을 보다가 나는 그만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너무 슬퍼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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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슬픔이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폭력 어린 세상에서 벗어나보지 못한 사람들. 명명하지 못하는 아픔 속에서 꿈을 잃은 사람들. 열심히 산 죄로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이다.
슬픔을 느낄 새가 없는 사람도 있다. 너무 많은 책임이 등 위에 얹혀 있어서, 슬픔이 혹여나 나를 무너트릴까 두려운 사람들이다. 슬픔에 좌절하는 건 아프니까, 이들이 택한 방식은 초연해지는 것이다. 마땅히 슬픈 일이라고 머리로는 이해하나, 동요되지 않을 정도로 슬퍼하기. 이것이 그들이 택한 방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이 무너져버리니까.
슬픔을 증오로 치환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슬픔은 나약한 것이고, 우울은 죄라 생각한다. 슬픔 앞에 참고 침묵하는 것이 이들이 기성의 세상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한편 정치는 증오로 슬픔을 덮고 있다. 거리 위엔 정치 현수막이 나부낀다. '처단' '빨갱이' 등 증오 서린 낱말로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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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막연히 상상한다. 견고히 세운 그 마음의 벽조차 없다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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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슬픔은 기억해야 한다. 그게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영영 잊히고 만다. 무관심의 틈 속에서 시름하다 형체도 없이 소멸될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많은 영혼을 외면했다. 표백제 끼얹듯 상실에 대한 기억을 소거했다. 슬픔을 잊기 위해. 상실을 잊기 위해 거짓 행복과 웃음으로 광고했다.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해 합동분향소를 철거했다. 미디어는 유가족의 투쟁을 이익을 위한 아우성으로 호도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대구 전철 참사 등 무수한 참사 앞에서.
6월 항쟁의 피해자들. 5.18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들. 부마항쟁 당시의 피해자들.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피해자들. 4.19 혁명 당시 피해자들. 독립운동 역사 속 피해자들 등 무수한 피해자 앞에서
우리는 냉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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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사회엔 끝없는 광기가 있을 뿐이다. 인간의 악마적 근성이 선의 탈을 쓰기가 너무나 쉬워진다. 인도네시아에선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1996년 대학살이 벌어졌다. 이후 30년 넘는 세월 동안 독재정이 유지됐다. 1990년 대 민주화 이후에도 독재의 잔재는 청산되지 않았다. 독재의 부역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수천 명을 죽인 학살 범죄자들 또한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람들을 살해했는지 자랑하는 것이 공연하다.
인도네시아엔 희생자를 위한 추모탑이 하나도 없다. 기념관이나 기념공원도 없다. 건축물은 국가 공동체의 문화와 관습 태도 지향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이다. 희생자를 기리는, 슬픔을 애도할 공간의 부재가 의미하는 바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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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슬픔이라 부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이들이 어떻게 슬픔을 목놓아 부를 수 있을까. 국가 공동체가 고민해야 할 것은 슬픔을 장려하는 것 아닐까?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나무라자는 것이 아니다. 슬픔을 강제로 종용하자는 것도 아니다. 슬픔을 느낄만한 여유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 국가적 차원의 애도 장려책을 마련하는 일 정도는 의지만 있음 가능하다. 구체적인 해법에 관해 논리적으로 쓰고 싶지 않다. 이 글은 논술문이 아니니까.
다만 간청하고 싶은 거다. 슬픔을 느낄 수 있게끔 해달라고.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슬픔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슬픔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그게 진짜 슬픈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