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논술 교사가 바라본 일베현상
“노무현은 살아있어요. 국정원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다고요.”
독서논술 수업 도중 아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당황해서 어디서 본 거냐고 물어봤다. 아이는 핸드폰을 꺼내더니 관련 기사를 보여줬다. 나는 도대체 어떤 언론이 이렇게나 터무니없는 기사를 올렸는지 궁금해서 화면 속을 들여다보았다. ‘S,, D,, S...?’ 지상파 방송국 SBS인 줄 알고 놀랐으나, 다행히도 ‘SDS’라는 듣도 보도 못한 플랫폼에서 쓴 기사였다. 찌라시성 이슈들을 모아 돈벌이 삼아 올리는 플랫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내가 SDS가 아니라 SBS 기사라는 것을 알려주기 전까지는 노무현이 살아있다고 확신했다. 근거도 여러 개 있다고 말했다.
“죽지 않았으니깐, 사람들이 아직까지 노무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라고요. 이것 보세요 선생님.”
물론 아이가 가져온 자료는 허점투성이였다.
노무현이 죽었으며, 죽은 사람에 대해 능욕하거나 모욕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주는 데까지 오랜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한참 뒤에야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물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준 거야?”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중학교 친구요”라고 대답했다.
‘아, 친구구나.’
아이의 대답을 듣고서 나는 잠시 나의 중학교 1학년 시절을 회상했다. 같은 반에 있던 친구가 자꾸 ‘운지’라는 말을 썼었다. 그 옆의 친구는 ‘노무노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검색창에 검색해 보니, ‘운지’와 노무노무’라는 표현 모두 노무현 대통령을 능욕하는 언어였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싫어할 순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장난거리 삼아 모욕하며 낄낄거리는 문화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학교 1학년 시절, 그 친구들이 내 옆에서 소위 ‘일베용어’를 쓸 때마다 심한 역겨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침묵하는 게 최선이었다.
아이는 정말 궁금한 듯 내게 물었다. “일베가 뭐가 나쁜 거예요? 그냥 웃기려고 하는 말들이잖아요.” 단순히 “나쁘니깐 보지마!”라고 강요했다간 아이가 엇나갈 것이라 생각해서 공들여 일베가 나쁜 이유를 설명했다. 긴 시간 동안 흥분하여 아이에게 설명한 내용을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웃음이랑 비웃음은 달라. 웃음은 다 같이 행복하지만, 비웃음은 조롱하여 웃음을 자아내기 때문에 누군가는 상처를 입는단다. 살면서 누군가를 싫어할 수는 있어. 근데 싫어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조롱해선 안돼. 선생님도 모든 대통령을 좋아하는 건 아니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싫어하는 대통령을 조롱하지는 않아. 젠틀하게 웃음을 자아내려는 노력을 해봐. 그게 멋이야.”
초중고 시절, 대부분의 아이들은 ‘장난’이라는 미명하에 폭력을 배운다. 폭력은 또래 문화를 통해 대물림되지만 학교는 이를 방관한다.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보호받는 기분을 받지 못한다. 언제 갑자기 폭력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학교로 향한다. 내가 일베를 접한 건 무려 14년 전이다. 그리고 14년 뒤의 중학생들도 여전히 일베문화를 학교에서 배우고 있다.
아이는 독서논술 수업을 통해 내게 속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 덕에 일베에 대한 이야기도 툭 하고 말할 수 있었다. 긴 시간의 대화를 통해 일베가 왜 나쁜 문화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서논술을 배우지 않는 아이라면? 일베가 나쁘다는 사실을 오랜 시간 공들여 설명해 줄 어른이 부재하다면? 독서 논술은 엄연한 사교육이며, 원래 이런 식으로 아이와 대화하는 것은 공교육의 역할이다. 공교육이 여전히 아이들을 경쟁으로만 내몰고, 옳고 그름을 고민을 할 기회를 빼앗는 것만 같아 황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