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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범 Oct 23. 2024

아이에게

독서논술 교사가 해주고 싶은 말 

“학원 선생님이 자꾸 저한테 욕을 해요.”


나에게 독서논술을 배우던 아이가 말했다. “요새 매일 11시까지 학원에 남아 있었어요.” 아이는 마지막 말을 약간 흐리면서 볼펜을 매만졌다. 


아이는 누적된 피로 탓에 부쩍 창백해 보였다. 소화가 안 된다며 화장실을 다녀오는 일도 많았다. 손을 덜덜 떨면서도 “논술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곤 했다. 수학, 영어 학원 숙제로도 이미 버거워보이는데도 논술에 열정을 쏟는 아이가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나는 독서논술이 재밌지 않으면 그만두는 게 좋다고 말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당장 고교 입시와 대입에 도움이 되는 수업은 아니니깐. 독서할 시간에 수학,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이 입시에 훨씬 좋으니깐. 이왕 하는 거 즐기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오랜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논술이 재밌다고 말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가진 꿈이 소설가"라고 말했다. 


소설가로서의 자질이 충분한 아이다.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간직하고 있다. 언젠가는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 있다. “비겁하고 치사한 애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을 보면, 저도 비겁해지고 싶어져요.” ‘올바름이 이익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플라톤의 고찰과 닮은 질문이었다. 또 하루는 이런 질문을 한 적 있다. “학교에 일베가 많아요. 인기를 얻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누군가를 웃기려 하는 바람에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 개그로 위장한 혐오 문화를 본 것이었다. 나는 아이의 비관 섞인 질문에 답하지 않은 적이 많았다. 나조차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과외가 끝나고 아이와 나는 스터디카페 밖으로 나갔다. 역까지 이어지는 은행나무 길을 걸었다. 나는 걸음을 멈춘 뒤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지금 너에게 주어진 슬픔을 외면한다면 어른이 됐을 때 감정 불구가 될지도 몰라. 컴컴한 동굴 안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데, 그 감정의 원인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 감정을 잘 봐줘. 그 안에 슬픔이 있다면 잘 보듬어줘.”


부모도 학교 선생님도 아닌 과외 강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라 생각했다. 아이는 알겠다고 말하며 눈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전철 개찰구 앞에서 헤어졌다. 수업이 끝나면 늘 역까지 나를 배웅하는 녀석이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했다. 어쩌면 아이에게 한 말은, 나 자신에게 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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