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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대의 반란

소소한 반란의 시작 / Intro

by 사십대의 반란

이 십년전 이탈리아 '페루지아'란 작은 도시에서 이탈리아어를 배울 즈음. 호주에서 오셨다는 할아버지 한분을 만났다. 거동이 불평할 정도의 나이 드신 할어버지가 각 나라에서 온 젊은 사람들 속에서 더듬 거리며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모습이 퍽 생경했다. 그래서 그 연유를 물어보았더니 답은 참 간결했다.


"내가 피자를 무척 좋아하는데 언젠가는 한번 꼭 이탈리아에 와서 배워보고 싶었지. 그 꿈을 지금 이루고 있는거라네"


몇년이 지난 뒤 캐나다의 '오소이오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만난 화가 베시 할머니. 외진 캐나다의 시골마을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며 주말마다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대자연의 그림을 그리던 할머니의 옆에서 나는 관습적인 질문을 던졌다.


"할머니 그림이 너무 멋지네요. 어느 미대 나오셨어요?"


"난 미대를 나온 적이 없어. 55살 은퇴할 때까지 토론토에서 비서를 했었지. 은퇴후에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봤어. 그렇게 선택한 그림을 5년을 하다보니 어느 덧 진짜 화가가 되어있더라고"


천성적으로 사람들의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나에게 여행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났던 공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새로운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어쩌면 한 곳만으로 강압적으로 몰리던 유년기에 대한 보상을 원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녔다.


서핑이 좋아 4년을 발리와 푸켓에서 살았다는 친구도, 네명의 친구들과 2년동안 돈을 벌어 요트를 사서 1년동안 요트에서 생활했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도 정말 흥미롭게 들었다. 캐나다의 외진 마을에 살던 어느 소녀는 네 시간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서로의 방향으로 두 시간씩 걸어와 중간지점에서 만나고 다시 두 시간 되돌아 걸어 집에 갔다는 첫 사랑의 이야기를 밝은 미소를 지으며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와 다른 곳에 사는 잘 사는 사람들의 '우아한 일탈' 같았고, 그래서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진 않았다.


그렇게 많은 영감을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잊은 채 나는 사회에 나왔다. 그리고 우리 세대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치열하게 세상에 끼어 전쟁과 같은 삶을 살았다.치열함 위에 듬뿍 뿌려진 행운을 통해 나는 어느새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던 방송사의 영상기자가 되어 있었고, 15년의 시간을 통해 나의 삶은 우리사회가 그어놓은 '정답'의 범위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억대연봉, 1년에 두세번의 해외여행, 다양한 취미 여가활동, 안정된 삶, 그리고 유능하고 심성좋은 지인들.


그러나 삶은 늘 빠듯했다.


그러던 어느날 놀아달라고 조르던 열 살된 딸이 집에서도 분주한 나를 보고 불쑥 묻는다.


"아빠, 행복해 지려면 더 높은 직급과 학위가 꼭 필요한거야?"


"엉? 그건..."


문득, 딸의 질문에 정신을 차려보니 노트북 모니터에 비친 내가 한없이 낯설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덧 초등학생인 딸의 성적을 고민하는 중년이 되어 있었고, 만성위염과 장염을 달고 사는 일상속에 있었다.


매일 하는 이야기는 주식과 아파트 값, 그리고 재테크로 성공한 사람들의 후기와 망한 사람들을 향한 연민같은 종류의 것들이었다.




그 때 불현듯 잊혀졌던 멘토들이 생각이 났다.




''과연 그들은 나보다 여유가 더 있기 때문에 그런 삶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들이 나보다 노력을 더해서 그러한 시간들을 보냈던 것일까? 과연 행복해지기까지 나의 노력이 부족한 것일까?'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옛 앨범을 펼쳤다. 그리고 그곳의 꿈많던 표정의 청년을 발견했다.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너무 모질었구나'


그렇게 나에게 사과했던 그 순간이 꿈많던 소년을 비로소 내 생애 처음으로 안아준 날이었다. 그리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년이 보장된, 요즘 보기 힘든 좋은 회사에 사표를 냈다.


사표를 내고 나니 글에서 보던 호기어린 모함가들과는 달리 불안감과 공포감이 엄습한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정표가 찍힌 포장도로를 달리다가 표지판 하나없는 오프로드에 내려오니 솔직히 잘했다는 마음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래서 심호흡을 하며 이십년전 베시 할머니가 인디언의 들판 위에서 해주었던 말을 다시꺼내어본다.



Betsy (96.08)


"인생에서 무슨 일을 시작하는건 누구나 두려워. 그건 사실 너의 나약함과는 관계가 없어. 두려움이란 인간이 새로운 것 앞에서 드는 건강한 감정이야. 그걸 자꾸 감추거나 부정하려 노력하지 마.

분명, 너의 도전이 늦어지면 더욱 더 두려울거야.


하지만 한가지만 명심해.

두려움이 너의 마음의 문을 닫게 하지는 마.

마음의 소리 방향으로 그냥 걸어가.


그럼 이미 넌 도착하기도 전에 행복해져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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