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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대의 반란 Feb 09. 2020

퇴사후 달라지는 것들

손안에 움켜쥔 것을 놓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잡을 수 없다

삶은 모두 다르다. 그래서 각자의 선택에 따르는 결과 역시 각자의 맥락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퇴사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은 이유는 우리사회는 나이에 따라 '정답'같은 것이 정해져 있는 것 같고, 그게 점점 불편하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 가장 위험한 도발은 이 순수한 동기로 시작한다.



먼저 지난 1년 퇴사 후 달라지는 것들..


첫째, 경제적 고민..

대학강사.

 일단 신용 카드 한장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우리 세대가 자주 낭만화하는 대학 사회는 비정규직, 시간,겸임,초빙,비정년트랙 등등 갖은 서열과 차별이 극심한 개혁이 아주 시급한 곳이다). 특히, 대우가 좋은 회사를 다녔다면 이런 경제적인 불편함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둘째, 항상 일상적으로 있던 동료들이 없다.

이 점은 제법 만족하며 좋은 회사를 다녔다는 사람들은 훨씬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정보를 잘 정리해주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고, 반대되는 생각도 말하던 이들이 없어진 여파는 생각보다 크게 다가온다.  이런 환경에서는 혼자만의 생각과 감정에 사로 잡히기가 쉽다.


셋째, 사회적인 대우와 특권..

당연히 만날 수 있던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다. 사회적인 '나'와 개인으로서의 '나'는 항상 같지 않다.


대략 지난 1년동안 이런 것들을 겪었다.


회사를 나와서 새삼 알게된 첫번 째 사실은 MBC란 사회적 아이덴터티를 부여받고, 정말 많은 특권을 누렸었다는 것이다. 회사는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일반시민에서부터 경제인, 문화예술인, 저명한 학자들, 그리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국립발레단을 따라 나폴리의 공연도 취재가고, 남아프리카 월드컵도 직관하고, 우리나라 기업들이 선전하는 세계 가전쇼도 다녀보았고, 이집트 혁명도 내 눈앞에서 이루어졌다. 문대통령 유럽순방을 가서 코펜하겐 시내를 바라보는 럭셔리한 숙소의 창문을 바라보며 커피도 마시기도 해보면서 소소한 일상 자체에도 사회적 특권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 생활을 하며 억대연봉을 받는 직업으로서의 공중파 기자. 이런 생활을 회사는 앞으로 15년 정도를 더 보장해 주었을 것이다. 나의 퇴사는 그래서 체질적으로 하드랜딩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정말 16년동안 정든 오래된 공간을 떠날만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I. 공간

영국의 얼스필드(Earlsfield)란 곳이 있다. 내가 4년 전 잠시 살았던 런던 윔블던(Wimbledon)의 바로 앞 정거장으로 런던시내에서 남쪽으로 이십분 정도 오면 나오는 작은 동네이다. 내가 처음에 이곳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역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던 제법 큼직한 공동묘지 때문이었다.


Earlsfield Cemetry


'저런 혐오시설이 어떻게 런던 시내에 있을 수 있지?'

런던에 와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 지나갈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매주말 새로운 꽃을 비석 옆에 꽃고 가는 사람들을 보고 변하기 시작했다.

현실과 전혀 연관이 없는 죽은 이들을 위해 꽃을 꽃아두는 사람들.

떠나간 사람들을 공존시키는 공간으로서의 묘지.  

묘지는 그 공간의 밀도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고도의 기능성과 사회적 관계로 얽혀진 사회가 익숙한 나로서는 아주 생경했다.


우리에게 죽은 자들까지 옆에 두고 돌볼 여유가 있는가?

그래 덜 발달했지.. 우린 아직..

하지만 영국과 우리는 어느 덧 경제규모가 비슷한 수준에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압축 성장의 열매를 우리 정체성에 넣고 사는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경제'와  '생산성'에 쏟아붙는 것 같다. 세상에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처세와 재테크 책들이  쉽게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런 문화는 내가 현재 강의를 하고 있는 대학 안에도 가득 스며들어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니고, 가장으로서 혹은 사회인으로서 당연히 감당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문제는 정도(degree)였다.


추억은 본질적으로 죽은 시간이다.

서울에서 자란 나는 서울이란 곳에서 더욱 이방인이 됨을 느끼는데 내가 어릴  적 살던 쓸모 없는 공간을 이 도시는 더 이상 남겨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직장을 다녔으면 무난히 강남의 집을 한 채 갖고, 딸 아이 유학 보내고, 60세까지 정년을 보장하는 회사 덕택에 노후도 재정적으론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나의 삶은 어릴적 내가 꿈꾸던 이상과는 정말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를 신화시하고 영웅시 하는 문화 보다는 조금 더 사는 느낌을 주고 받는 방법은 없을까?

내가 이런 생각을 말하면 주변에선 100세 시대를 어떻게 버티겠냐고 돈을 버는데 더욱 집중을 해야한다고 독려한다. 날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으로 몰려가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학원에 애들을 밀어 넣으며 성공신화를 쓰라고 한다.



II. 시간, 나이, 돈


다른 도전에는 정말 돈이 많이 필요한가?


캐나다의 한 은퇴하신 할아버지는 현재 유명한 휴양지 칸쿤 인근 마을에서 살고 있다. 현지 주민이 사는 동네에 3베드룸 아파트를 50만원에 빌렸다고 한다. 룸메이트와 살면서 이 마저도 절반으로 나눠서 25만원씩 렌트비를 내고 있다고 하셨다. 의료시설 같은 인프라에서부터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반에 만족하고 계셨다.


하게도 미국 캘리포니아의 시골마을에 사는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미국인 친구 매트 역시 생활의 변화를 꿈꾸면서 결정을 쉽게 하지 못하는 나에게 인생이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기에도 모자라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서핑을 좋아하는 이 친구는 발리에서 4년을 거주하면서 서핑을 맘껏하다가 3년전 미국으로 돌아가 농사일을 하고 있다. 그는 부자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따라가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매트는 나에게 교사였던 자신의 엄마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의 꿈은 정년까지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세계여행을 다니는 것이었는데 오십대 중반에 찾아온 지병으로 인해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삶은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산소마스크를 끼고 여행을 하시는 할머니(천섬, 캐나다)



우리는 자신의 삶의 결을 놓칠만큼 빠른 속도의 자본화된 공간에 살고 있다. 이 '정답'말고는 정말 없는 것일까? 이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안전지대를 그렇게 나왔다. 44살에 두번 째 석사를 했다면, 몇 년이 더 지난 지금 이젠 해외 박사과정에 진학하려 한다. 준비를 해서 영국과 캐나다에 어플라이를 했다. '돌아와서 교수되는 것이냐'란 경제적 효용에 대한 질문을 내 삶에 보다 충실한게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바꾸면서...


이런 계획을 이야기하면 열에 열은 묻는다. 그 나이에 가능하겠냐?



우리 사회는 나이에 아주 엄격하다. 나이에 따라 위계와 역할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이든 사람이 이런 저런 이유로 회사를 나오면, 특별히 갈 곳이 없다. 인권위가 아무리 권고를 해도 나이를 둘러싼 사회문화에서 오는 불편함을 감내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많은 회사들은 나이조건을 공개적으로 게시못하게 하는 인권위의 권고 뒤에서 경력 '3-8년' 식으로 필터링을 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로 영국에서 만난 미국 실리콘 벨리의 한 회사에 다니는 게임분야 엔지니어였던 한 분은 한국에 가면 관리자를 해야하는데, 그렇게 오라는 회사도 없을 뿐더러, 자신은 관리보다 필드 일이 더 좋다고 하셨었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그 분의 말뜻을 점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나이로 우리를 옳아매고 있다. '이 나이에 내가 그걸하랴?' 혹은 '50대에 공무원된 사연', '마흔에 도전하는..' 일상생활 속에 이런 말들이 가득하다. 과연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나이가 필요한가? 애당초 그건 특별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니까...


Canadian Rockies 2018


나에게 가장 큰 삶의 울림을 주셨던 캐나다의 베시 할머니는 시골마을에 스튜디오를 갖고 계신 화가였다. 그녀는 55세에 은퇴를 하고, 다시 제 2의 도전을 해서 60세에 전문화가가 되신 분이셨다. 이십대 초반에 만났던 그분은 내가 직장 생활을 하다가 먼 훗날 영화를 공부하러 유학을 나오고 싶은데, 그 나이가 너무 늦을 것 같아 걱정이다란 내 말에 다음과 같이 충고해 주셨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건 누구나 두려운 일이야. 두려움을 감추려고 하지 마. 그건 인간 누구나 새로운 일 앞에서 드는 건강한 마음이야. 하지만 두려움이 하고자 하는 너의 마음과 희망을 붙잡게 하진 마. 그냥 너의 마음의 소리 방향으로 걸어가면 돼. 그렇게만 한다면, 넌 너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아도 행복할거야..'


나는 올 해 여름, 우리나라를 떠나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이다.


Richmond Park, London



III. 퇴사 후 꼭 외국 생활?


꼭 외국일 필요가 있을까?


첫번째는 취향의 문제로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두번째는 '정답'을 끊임없이 제시하는 공간과 운영체계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적어도 현재 나에겐 그렇다. 삶은 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니까 이 질문에는 맥락이 제일 중요할 것이다.

나는 나이를 떠나 더 도전하고, 알아가고, 더 많이 공유하고 살기를 희망한다.


우리사회는 분명 더 좋아졌고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타이밍이다.

나에게는 그 좋아진 것들이 내 인생과 동기화가 되는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많은 사람들은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관리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많은 모순들을 감내하고 버틴다. 아니면 먹고 살아야지라는 문제로 단순화한다. 하지만  그 수고로움을 거쳐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그다지 귀감이 되질 못했다. 그리고 돈은 얼마나 가져야 안정에 이르게 되는 건지 헤아릴 수가 없다.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때 행복해 질 수 있다라는 가정이자 믿음이다. 


딸 아이가 성장할 때 옆에 더 있어줄 수 있고, 복잡한 사회생활을 버티며 버티기 보다는 그 에너지를 보다 더 잘쓰고 싶다. 박사를 하고자 하는 이유는 교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을 뭉쳐서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작업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소망 때문이다. 참 순진하고 단순한 생각이지만, 적어도 내겐 부자가 되는 것보다, 또 '폼나는 자리에 앉는 것보다 그게 더 진짜의 삶에 가깝다.  


어플라이한 결과가 곧  나올 것이다.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두렵다.

이 실험적인 삶이 어떤 결과를 줄 지는 모른다.

이 공간에서의 글은 이 과정에 대한 기록이 될 것 같다.


돈버는 것은 삶의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오늘도 묻는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 대답에 대답하는 나의 마음이 나의 정답이다..

꼰대가 아닌 도전하는 모습 자체가 가장 큰 교육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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