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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대의 반란 Jun 21. 2019

라오스의 소수민족 몽족 이야기

세계 인권에 대한 불편한 진실 

얼마전 라오스 남쪽에서 플렌테이션 커피농사를 하던 친구가 대규모 경작 사업을 정리하고 북쪽에 있는 오지 산림마을에서 작게 커피 농사를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 말이 생뚱맞기도 했고, 또 직업이 궁금함을 해소하는 일이라 바로 라오스로 날라갔다. 


라오스 남쪽 팍세(Pakse)의 밀림을 개간해서 900톤에 가까운 커피를 생산했던 친구의 커피밭을 5년전 방문 할 때의 기억이 있던지라 이번에도 비슷하겠지 하는 생각에 큰 준비없이 생전 처음 듣는 씨앙쿠앙 공항으로 향했다.


(씨앙쿠앙공항)


라오스 청년이 모는 4륜 포터가 공항에 나와있었고, 흙먼지를 날리며 차는 뜨거운 태양 아래 황토길을 달려갔다. 

'이곳이 마지막 가게이니 필요한게 있으면 사. 앞으로 두 시간 정도 가야하는데 너가 아는 비포장은 아닐거야'


친구의 말을 입증하기라고 하는 듯 차는 달리는 중간중간 웅덩이에 바퀴가 빠졌고, 그때마다 차에서 내려 삽으로 길을 내고 차를 밀어야 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달려서 라오 몽족이 사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집안에 급수시설이 없을 뿐더러 화장실도 없는 집들이 허다하다. 심지어 이 마을에 하나 있는 작은 학교 안에도 화장실이 없어서 나대지에 구멍을 하나 파놨을 뿐이었다. 물론 칸막이 벽도 없었다. 


그리고 더욱 놀란 것은 이 곳은 바로 서방세계가 악의 트라이앵글이라고 호명하는 세계 대마재배의 심장과도 같은 지역이었다. 딱히 할 것 없는 오지마을인지라 남자들 상당수는 대마에 손을 대고 있었다. 도착했을 당시에도 많은 아저씨들의 눈이 풀려 있었다. 


친구는 이곳에서 대마를 뽑고 커피를 심으면 전량을 매수해주겠다는 제안을 마을회의에서 했고, 마을 사람들은 긴 회의를 통해 그렇게 하기로 어렵게 결정을 내렸다. 이 모두가 가능했던 것은 내 친구가 팍세에서 커피농사를 할 때 고용했던 직원중 한명이 이곳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커피 쇼케이스)


이곳에서 대마재배는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험준한 산림지대에 인구도 얼마되지 않아 농사는 거의 못하고 조금의 화전을 해서 나온 약간의 쌀과, 채취한 나물로 이들은 세끼를 해결하고 있었다.  나물을 캐기 위해 열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은 자기 몸만한 광주리를 매고 아침마다 길을 나선다. 곧 돌아올 것 같은 어린아이들은 저녁무렵이 되서 돌아왔다. 이미 인근 나물은 다 캐내어 먹은 뒤라 그나마 풀한장 밥상에 올리는데에도 한나절이 나가는 지역까지 아이들은 나가야 했다. 


그런 아이들을 보니 난 젊은 아저씨들이 대마에 취해 있는 모습이 내심 못마땅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 들은 설명은 내가 상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이야기였다.


대마를 키우기 시작한 시작점은 베트남전이었다. 미국과 치열한 교전을 하던 베트공들은  미국의 폭격을 피해 라오스로 우회를 해서 북쪽에서 남쪽 접전지역으로 이동해서 들어왔고, 이를 간파한 미국은 길목에 있던 몽족을 포섭하기 위해 제안을 한다.



"우리를 도와라 그리고 너희가 대마를 키우면 우리가 판로를 마련해서 큰 수입을 주겠다" 


소수민족으로 큰 대접을 받지 못하던 몽족은 그렇게 미국을 돕게 되었고 미국은 패전하며 더이상 이들과의 관계가 필요없게 되었다. 그 곳에 미국 CIA의 흉물스러운 벙커들만을 남긴 채 미국은 깨끗하게 손을 떼고 이들을 외면하게 되었다. 이런 과거를 뒤로 한 채 서방미디어들은 라오스 미안마를 연결하는 지역을 세계의 마약지대로 호명하며 문제지역으로 부각하곤 한다.



베트남을 도왔던 공산주의 정권인 라오정부 역시 이들이 곱게 보일리 없다. 많은 이들이 박해와 죽음을 당하고 이들은 숨어숨어 그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소수만이 살아가게 되었다.  


우리는 식민을 경험했지만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이 상당히 약한 것같다.  제국주의 경영을 하며 식민 국가 곳곳에서 우리와 비슷한 문제를 일으킨 서방 선진국은 항상 인권의 선진국으로 우리의 롤몰델이 되고 있고 있다. 


어제는 난민의 날이었다. 내가 영국에서 난민학과 미디어학의 교점위에서 논문을 쓰다 알게 된 사실은 난민의 개념은 양차대전의 진영논리와 냉전시대에 더 많은 국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정치적으로 개발된 측면이 상당부분 있다는 것이다. 냉전이 끝나면서 서방 국가들에게 난민의 레토릭은 더 이상 이들의 정치적 목적에 쓸모가 없게 되었고,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들은 난민의 보편적 인권의 개념을 과거처럼 적극적으로 끌어안지 않는다.


우리도 선거 때마다 북한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최근에는 선거에 탈북자들이 왕왕 등장하곤 한다. 그 때마다 인류문명에서 권력자들이 수천년 동안 반복적으로 취해온 방식들이 생각나서 절망감이 들곤 한다. 정치는 대중의 무지와 분열을 먹고 산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 험한 산위에서 태어나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 같은 어린아이들의 미래가 생각나서 힘이 들었다. 내가 그 주민들과 다른 점은 '나는 작당한 시간에 적당한 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분열로 먹고 사는 우리의 후진적인 정치문화를 그렇게 혐오하고, 인간애가 없어지는 세상에 그렇게 절망하면서도, 그래도 놓을 수 없는 것은 정치가 올바르게 나갈 수 있도록 치열하게 토론하고 공유하고 실천하는 '참여'일 수 밖에 없다. 세계가 연결되고 한 나라의 주권이 약해진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는 비단 우리나라 사람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과도 함께 해 나아가야할 작업인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다보니 결국은 내 딸이 살아가야할 미래의 환경을 고민하게 된다.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에서 내 아이만 잘 사는 그런 일은 지구상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보다 치열하게 연대할 필요가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라오 몽족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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